개구리소년 범인…33년 지난 이 사건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 (+꼬꼬무)
2024-01-12 01:05
add remove print link
역대 최악의 미제 사건
'꼬꼬무'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 재조명
33년 전 일어난 개구리소년 사건이 '꼬꼬무'를 통해 재조명됐다.
11일 밤 10시 20분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이하 '꼬꼬무')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91 개구리 소년> 편이 방송됐다.
때는 1991년 3월 26일. 이날은 30년 만에 지방자치제가 부활해 기초 의원을 뽑는 선거일로 임시공휴일이었다.
당시 학교가 쉬자 오전 8시 경 우철원 군(6학년), 조호연 군(5학년), 김영규 군(4학년), 박찬인 군(3학년), 김종식 군(3학년), 김태룡 군(3학년) 등 6명은 호연 군 집 근처에서 놀다 깡통과 막대기를 챙겨들고 인근 와룡산으로 향했다.
이중 김태룡 군은 아이들을 따라가려다 "위험하니 너무 멀리 가서 놀지 말라"라는 부모님의 말을 떠올렸고 아침 밥도 먹을 겸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해가 지도록 다른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개구리 소년 부모들은 오후 6시부터 와룡산 주변에서 아이들을 찾다가 오후 7시 50분 경찰에 실종 신고를 접수했다.
이후 경찰은 부모들과 함께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와룡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이 사건은 매스컴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면서 당시 노태우 대통령 특별 지시로 군과 경찰이 총동원되어 와룡산 주변은 물론 전국을 이 잡듯이 뒤졌다.
당시 대구지역 군경 수천 명이 탐침봉까지 들고 와룡산 전체를 뒤졌으나 전부 허사였다.
또한 사건 초기 경찰은 5명의 아이들이 가정불화로 인해 가출했고 앵벌이 등에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엉뚱한 수사 방향으로 본격적인 수사가 늦춰졌다.
심지어 개구리 소년 범인 정체를 알고 있다는 심리학자가 나타나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당시 심리학자는 범인을 실종된 아이의 한 아버지로 지목했고 그 집에 아이들이 암매장되어 있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이에 취재진과 주민 5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찰이 발굴 작업을 시작했으나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심리학자는 도망가듯 현장을 떠났고 그 피해와 상처는 고스란히 유가족들에게 남았다.
그로부터 11년 6개월 뒤 세간의 관심이 거의 사라졌던 2002년 9월 26일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라간 오우근 씨에 의해 5명의 유골이 와룡산 기슭에서 발견된다.
당시 이 지역은 과거 군부대 사격장과 가까워 어린 아이들이 탄피를 모으기 위해 자주 올라왔다는 제보가 잇따르면서 일각에서는 개구리 소년 사건 사망 원인을 두고 오발탄에 의한 타살로 추정했다.
그러나 법의학자들은 부검 결과 둔기나 흉기에 찔려 타살된 것이라고 추정했다. 다만, 그 외 별다른 사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범인도 알 수 없었다.
경찰이 다양한 도구로 조사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버니어 캘리퍼스'가 범행 도구라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실험을 통해 다목적 가위가 실제 상흔과 가장 유사한 결과를 냈다고 주장했다. 물론 실제 범행도구라는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버니어 캘리퍼스는 아니라고 부연 설명했다.
또한 대다수 법의학자들도 개구리소년 사망 원인을 두고 저체온사가 아닌 타살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후 수사는 진척이 없었고 결국 개구리소년 사건 범인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미 개구리소년 사건은 2006년 3월 26일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2015년에는 내사마저 종결돼 지금에 와서 범인이 잡혀도 처벌할 수 없다.
하지만 33년이 지난 이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개구리 소년들의 시신은 화장해 강에 흘려 보냈으나 한 가지 흘려 보내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아이들의 두개골이다. 이것은 개구리소년 실종 사건의 진실을 찾기 위해 남겨둔 아이들의 마지막 흔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