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통증이 신체를 핥는 느낌” 박진성 시인 유서 추정 글 (전문)

2020-10-15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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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성 시인이 14일 페이스북에 올린 내용
극단적 선택 암시하는 글 올리고 잠적해

박진성 시인 / 이하 SBS '모닝와이드'
박진성 시인 / 이하 SBS '모닝와이드'

박진성 시인이 유서로 추정되는 글을 남기고 잠적했다. 박 시인은 지난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이슈가 불거질 당시 이름이 언급됐다가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고 누명을 벗었다.

15일 경찰에 따르면 박진성 시인은 전날(14일) 오후 11시 40분쯤 자신의 페이스북에 극단적 선택을 암시하는 글을 남겼다.

박진성 시인은 이 글에서 "2016년 그 사건 이후, 다시 10월입니다. 그날 이후 저는 '성폭력 의혹'이라는 거대한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뎌 보고 견딜 수 없을 때까지도 견뎌 보았습니다. 매년 10월만 되면 정수리부터 장기를 관통해서 발바닥까지 온갖 통증이 저의 신체를 핥는 느낌입니다. 정말 지겹고 고통스럽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진성 시인은 "저는, 제가 점 찍어 둔 방식으로 아무에게도 해가 끼치지 않게 조용히 삶을 마감하겠습니다. 다음 세상에서는 저의 시집 '식물의 밤'이 부당하게 감옥에 갇히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세상에서는 저의 시집 계약이 부당하게, '단지 의혹만으로' 파기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해당 글을 발견한 이들이 박진성 시인 소재지인 대전지방경찰청에 112 신고를 했다. 대전 동부경찰서는 여성청소년팀을 중심으로 박진성 시인 가족 등을 접촉하며 추적 수사하고 있다. 현재 박 시인 휴대전화가 꺼진 상태여서 행방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전해졌다.

박진성 시인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 전문이다.

2016년 그 사건 이후, 다시 10월입니다. 그날 이후 저는 '성폭력 의혹'이라는 거대한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뎌 보고 견딜 수 없을 때까지도 견뎌 보았습니다. 매년 10월만 되면 정수리부터 장기를 관통해서 발바닥까지 온갖 통증이 저의 신체를 핥는 느낌입니다. 정말 지겹고 고통스럽습니다.

저의 돈을 들여 아무도 읽지 않는 시집을 출판도 해 봤습니다. 죽고 싶을 때마다 꾹꾹, 시도 눌러 써 봤습니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습니다. 살려고 발버둥칠 수록 수렁은 더 깊더군요.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평생을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철학자는 암 선고를 받고서야 비로소 그 충동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지금 제 심정이 그렇습니다. 제 자신이 선택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시집 복간, 문단으로의 복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살부빔,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습니다.

단지 성폭력 의혹에 휘말렸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잃는 사태가 저에게서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어떤 의혹과 의심과 불신만으로 한 사람이 20년 가까이 했던 일을 못하게 하는 풍토는 사라져야 합니다.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이 삶에 미련이 없는데도 이렇게 쓰다 보니까 미련이 생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까지만 쓰겠습니다. 지금은 대통령으로 계신 한 정치인을 사랑했고 시를 사랑했고 썼고 좋은 자식, 좋은 남자,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응원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제가 점 찍어 둔 방식으로 아무에게도 해가 끼치지 않게 조용히 삶을 마감하겠습니다. 다음 세상에서는 저의 시집 <식물의 밤>이 부당하게 감옥에 갇히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세상에서는 저의 시집 계약이 부당하게, '단지 의혹만으로' 파기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유튜브로 영화를 처음 다운 받았습니다. 오달수 배우가 출연했던 영화입니다. 장면들도 좋지만 음악이 더 좋은 영화입니다.

The last waltz.

모두가 꿈 같습니다.

멀리 저 세상에서 이곳을 열렬히 그리워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곳의 삶은 충분히 행복하다는 걸 아시길. 모두가 행복하진 못하더라도 더 불행해지진 마시길, 간곡하게 두 손 모아 마지막으로 기도합니다.

- 2020년 10월 14일 박진성 올림.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home 손기영 기자 sky@wikitr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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