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으로 망한 나라?”... 뉴질랜드 페미니즘의 진실
2017-11-20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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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여성 총리 재신다 아던은 출산 휴가 계획을 묻는 토크쇼 진행자에게 “그 질문을 용납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It is totally unacceptable(전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뉴질랜드 여성 총리 재신다 아던(Jacinda Ardern·37)이 노동당 대표이던 시절 출연한 TV쇼에서 ‘출산 휴가’에 대한 질문을 듣고 한 답변이다.
재신다 아던은 노동당 대표로 취임한 직후인 지난 8월 뉴질랜드 아침 방송 ‘AM쇼’에 출연했다. 전날 밤 출연한 프로그램인 ‘더프로젝트’ 진행자로부터 “많은 뉴질랜드 여성이 아이를 갖는 것과 일을 계속하는 것을 두고 고민한다”라며 “(당신은) 결정을 내렸는가”라는 질문을 듣고 난 후였다. AM쇼 진행자와 패널은 아던과 함께 이 질문이 적절한지를 논의했다.
이때 패널로 출연한 마크 리처드슨(Mark Richardson)이 “난 그 질문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라며 “아던은 총리가 될 수도 있다. 여성들은 출산 휴가를 간다. 총리가 현직에 있는 동안 출산 휴가를 가는 게 괜찮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아던은 리처드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는 그 문제에 답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괜찮다. 하지만 당신(이 한 말은), 2017년에 여성들이 직장에서 그런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라고 분노했다. (영상 4분 10초부터)
리처드슨 발언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자 뉴질랜드 인권위원회는 “임신, 피임, 가족계획 등을 고용주가 묻는 것은 인권법에 위배될 수 있다”라고 밝혔다. 뉴질랜드 국민 1만 6000명 중 67%도 뉴질랜드 헤럴드가 실시한 온라인 여론조사에서 “고용주가 여성에게 출산 계획에 관해 물어보면 안 된다”라고 답했다.
◈페미니즘으로 망한 나라가 뉴질랜드?... 화제 된 ‘유튜브 영상’
뉴질랜드는 1893년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나라다. 첫 여성 총리였던 헬렌 클라크(Helen Clark·67)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성 정치인을 배출해낸 국가이기도 하다. 이 때문인지 뉴질랜드는 한국에서 ‘여성 권익이 높은 곳’으로 인식된다. 국내 포털 사이트에 뉴질랜드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에 ‘페미니즘’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마냥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니다. 지난해부터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뉴질랜드가 페미니즘 때문에 분열되고 있다’는 괴담이 돌았다. 유튜브에 ‘한국 페미니스트가 사랑하는 뉴질랜드 페미니즘 최후’라는 제목으로 뉴질랜드 ‘여성부’를 중점적으로 다룬 영상이 지난해 10월 올라오고 난 뒤였다.
영상 제작자는 “극단적 페미니스트들이 뉴질랜드 정치계를 장악했다”, “세계 최초로 여성부가 생겨 ‘여성 위주 법’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뉴질랜드 남성들이 못 견디고 해외로 떠난다”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남성들이 결혼을 피하자 여성들이 콘돔에 구멍을 낸다”라고 했다.
제작자는 구체적인 증거를 들었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이혼할 시 여성이 무조건 양육권을 가져가고 남자는 월급 80%를 여성에게 양육비로 줘야 한다고 했다. 국외로 떠나는 남성 비율이 18%나 된다며 정확한 수치까지 제시했다. 이 영상은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로 공유되며 크게 화제가 됐다.
몇몇 인터넷 이용자는 영상 내용을 표와 그래프를 덧붙인 글로 만들어 블로그 등에 게시했다. 실제로 지난 10일 오후 포털 사이트에 뉴질랜드 페미니즘을 검색하니 ‘뉴질랜드 페미니즘의 최후’, ‘페미니즘이 불러온 대재앙’이라는 제목으로 영상 내용을 짜깁기한 게시 글이 다수 나왔다. 영상에서 제기된 주장들은 사실인 것처럼 확산 됐다.
◈뉴질랜드 남성, “미안하지만 난생 처음 듣는 소리”
뉴질랜드에 사는 사람들은 이 동영상을 어떻게 생각할까? 지난 9일 뉴질랜드 남성 1명과 전화 인터뷰를 했다. 영상 내용을 전해 들은 그는 당황스러워했다. 그는 “어이가 없다. 진짜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계 뉴질랜드인인 20대 후반 남성 A 씨는 “그런 얘기는 한 번도 안 들어 봤다. 본 적도 없다”라며 “여기 남자들 다 (여성 인권 신장에) 엄청 긍정적이다. 오히려 한국이 (페미니즘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는 게) 심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그는 “페미니즘 때문에 뉴질랜드 떠나는 남자 없다. 친구들 다 뉴질랜드에서 멀쩡히 잘살고 있다”라고 했다.
A 씨는 뉴질랜드 북섬에 위치한 오클랜드 엡섬(Epsom)에서 자랐다. 지금은 몇 년 전 가족 모두가 호주로 이민 와 시드니에서 약사로 일하고 있다. A 씨는 “호주가 임금도 높고 물가도 훨씬 싸다. 미래를 위해서 온 거다. 뉴질랜드를 떠나는 남성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별도 비자 없이 호주에서 살 수 있는 등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라고 했다. 영상에서 나온 것처럼 페미니즘을 피해 온 것은 아니냐고 묻자 “절대 아니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또 “뉴질랜드에 한 3년 있다가 한국 간 아저씨가 만든 영상 같다. 뉴질랜드 한 번도 안 온 사람들이 하는 얘기다”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이유는 “기사를 본 아저씨들이 욕할 것 같아서”였다.
뉴질랜드에서 4년째 살고 있는 이수진(여·30) 씨는 지난 14일 전화통화에서 "여기는 페미니즘이 한국처럼 '뜨거운 감자'가 아니다"라며 "서로 인권을 존중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지내다 이곳에 와보니 차이가 느껴지기는 한다"라며 "여성이라서 불이익을 받는 부분은 없다"라고 밝혔다.
이 씨는 뉴질랜드 생활하며 겪은 일은 전하기도 했다. 평소 평행 주차를 잘 못 하는 이 씨가 한 카페 주차장에서 곤란해하고 있자 지켜 보고 있던 손님이 대신 주차해 줬다는 사연이었다. 이 씨는 "하지만 이게 여자라서 도와줬던 것은 아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남성 재산 80%는 근거 없는 헛소문” 최유택 변호사 인터뷰
동영상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여성 위주 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최유택 법무 법인 대륙아주 파트너 변호사를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최유택 변호사는 뉴질랜드 남섬에서 3년, 북섬에서 약 20년 이상, 총 28년 정도를 변호사로 지냈다. 동영상 내용을 들은 그는 “법은 사회 필요를 매개로 만들어진다. 사회 분쟁 거리를 막기 위해 생긴다. 한쪽 권익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단호히 말했다.
약 30년간 뉴질랜드에 살면서 지켜본 ‘뉴질랜드 여성’은 어떤가?
다른 나라에 비해 뉴질랜드가 여성의 사회적, 정치적, 법률적 권리가 강한 것은 사실이다. 여성 참정권을 처음 법제화시킨 나라인 데다가 수상 중에도 훌륭한 여성 정치인이 많았다. 또 뉴질랜드 여성은 외형적, 정신적으로 굉장히 강하고 독립적이다. 단편적으로 예를 들면 여성이 땅 파고 있는 걸 남성이 옆에서 구경할 정도다. 뉴질랜드에 파견된 동안 느낀 것은 “뉴질랜드 여성들이 굉장히 세구나”였다.
그게 보편적인 사회 분위기인가?
뉴질랜드는 이민자들의 나라다. 특히 19세기 말 이민 회사가 생기면서 생산력, 즉 노동 능력이 뛰어난 이민자를 받아들였다. 처음부터 노동집약적 구조로 세워진 나라다. 그러다 보니 남녀 성별을 따질 겨를이 없지 않았을까?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일해야 했다. 지금도 비슷한 분위기인 것 같다. “나는 여자니까”라는 생각으로 배려받고 싶어하는 여성이 거의 없다.
뉴질랜드에서 이혼할 때 재산 분할은 어떻게 하는지 간단하게 설명해 달라
결혼한 지 3년이 넘었을 경우에 50대 50으로 재산 분할을 한다. 결혼은 안 했지만 함께 사는 연인도 마찬가지다. 뉴질랜드에서는 이걸 ‘파트너’라고 한다. 법적인 혼인 없이 남녀가 가정을 이뤄 사는 경우를 말한다. 한국 ‘사실혼 관계’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이 경우에도 별다른 이유가 없는 한 재산을 반반 나누는 것이 원칙이다. 남성 재산 80%를 여성이 가져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한 명에게 심각한 유책 사유가 있을 경우 등에는 예외가 있을 수 있다.
양육권은 어떤가?
뉴질랜드 법원은 부모가 이혼할 때 아이 행복(welfare)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근데 아무래도 여성이 아이를 잘 키우지 않나. ‘남자라서 소홀하다, 여자니까 당연하다’는 논리가 아니라 여성이 남성보다 차분하고 안정적이게 가정을 꾸리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다. 남자가 여자만큼 일하면서 아이를 잘 돌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아이를 잘 보듬어 줄 수 있는 엄마에게 양육권이 가는 경우가 많은 거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이의 행복, 정서적인 안정감 등이 우선되기 때문이다. 남자라서, 또는 여자라서 양육권을 가져가는 문제가 아니다.
뉴질랜드에도 여성이 차별받는 부분이 있나?
안타깝게도 여성들이 부담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들이 정말 많다. 한국이나 뉴질랜드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로펌에서 가장 높은 직급이 ‘파트너’다. 보통 입사 동기가 10명이면 여기서 2, 3명 정도가 8년에서 12년 사이에 파트너가 된다. 근데 파트너가 될 친구들은 처음부터 티가 날 정도로 능력이 탁월하다. 특히 여성 중에 많다. 여성 중에 똑똑한 친구들은 정말 똑똑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 여성 동기들이 한 명씩 사라진다. 출산이나 육아 때문에 그렇다.
뉴질랜드는 아내가 출산하면 남편이 출산 휴가를 가지 않나? 많이 도와줄 것 같은데
물론 남편들이 출산 휴가, 육아 휴가 다 간다. 그래서 여성 부담이 덜어진다는 건 이론적인 얘기다. 현실에서 직장 여성들이 가사 노동, 육아 등 부담하는 게 정말 많다. 그러다 보니 임금에서도 차이가 난다. 뉴질랜드는 노동법이 굉장히 잘 돼 있어서 여성이 출산 휴가나 육아 휴가를 갈 경우 고용주가 부담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고용주 입장에서는 ‘여자는 생산성이 떨어진다’라고 판단하게 된다. 여성 권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에 비해 임금 격차가 있는 편이다. 심지어 변호사도 남녀 간 임금에 차이가 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최유택 변호사는 “뉴질랜드라고 특별한 페미니즘이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페미니즘이란 게 19세기에 성행하던 시대사조 아닌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지금 이 주제는 ‘성 평등’이란 시각으로 봐야 한다”라고 했다.
◈뉴질랜드도 남녀간 ‘임금 격차’ 여전
지난 2일 세계경제포럼(WEF·이하 포럼)이 ‘2017 세계 성별 격차 보고서’를 발표했다. 뉴질랜드 성 격차 지수는 0.791로 조사 대상 144개국 중 9위였다. 뉴질랜드는 2015년도 10위였던 것에 비하면 한 단계 오르긴 했지만 2010년부터 7년간 꾸준히 하락세를 보였다. 2014년에는 13위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성 격차 지수는 ‘경제 참여 기회’, ‘교육적 성취’, ‘건강과 생존’, ‘정치적 권한’ 등 분야에서 성별 격차를 측정한 지수로 1에 가까울수록 성 평등이 잘 실현됐다는 뜻이다.
뉴질랜드 여성부가 올해 3월 발표한 연구 보고서 ‘뉴질랜드 성별 임금 격차의 실증적 증거’에서도 남녀가 받는 임금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첨부된 그래프에서 여성은 시간당 15NZD(뉴질랜드 달러)를 받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면 남성은 시간당 15NZD부터 30NZD까지 고르게 분포해 있었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남성은 시간당 평균 시급이 29NZD인 반면 여성 평균 시급은 25NZD였다.
이 같은 차이를 지적하듯 최근 뉴질랜드에 ‘남자는 돈을 더 내는 카페’가 생겼다. 뉴질랜드 남섬 넬슨(Nelson)에 위치한 ‘포메로이의 커피(Pomeroy’s coffee)’는 커피를 사는 남성 손님에게 지난 8월 한 주간 50센트씩 추가 요금을 받았다. 우리나라 돈으로 400원이 조금 안 되는 가격이다. 당시 이 가게의 특별한 캠페인이 화제가 돼 지난 8월 15일(현지시각) 뉴질랜드 매체 ‘스터프(Stuff)’에서 영상과 함께 보도했다.
카페 주인 헤이든 톰슨(Hayden Thompson)은 “이 움직임이 뉴질랜드 남녀 임금 격차 논의의 기폭제가 되길 바란다”라며 “손님 99% 정도가 캠페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라고 매체에 밝혔다. 톰슨은 또 “손님 대부분이 ‘임금 격차 문제가 수년 전에 해결된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라며 “그들이 마땅히 임금을 인상 받아야 하는 직장 여성들에 대해 생각해보길 바란다. 추가 요금은 전부 여성 단체에 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상에 등장한 남성 손님 존 보한(John Vaughan)도 “지금 우리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돈을 받아야 하는 지점에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