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벨벳으로 물리 공식 익히고, 트와이스 분필 만들어요” 아이돌 동아리 열풍
2017-10-31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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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가 테니스 공을 바닥에 던졌습니다. 공이 포물선 운동을 시작하네요”
인천 송천고에는 '레드벨벳 동아리'가 있다. 지난 3월 걸그룹 '레드벨벳'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모여 결성한 동아리다. 학교가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지난 16일 송천고 근처 카페에서 '레드벨벳 동아리' 회원들을 만났다. 학생들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레드벨벳 케이크'(버터밀크가 들어가는 붉은색 케이크)를 간식으로 골랐다.
동아리 활동을 재연해달라고 하자, 동아리 부장 박진우(18)군이 가방에서 종이 한 뭉치를 꺼냈다. 레드벨벳 뮤직비디오와 노래 가사를 엮은 자료였다. 김강현(18) 군과 조지환(18) 군이 돌아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러시안룰렛'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예리가 테니스공을 바닥에 던집니다. 공이 포물선 운동을 시작하네요. 테니스공이 최고 높이까지 올라가는 시간은 얼마일까요? '물리2' 공식에 따르면..."
◈ "슬기와 공부하는 기분" 송천고 레드벨벳 동아리
박진우 군은 지난 1월 레드벨벳 동아리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겨울방학 때였죠. '국어 시간에 케이팝 읽기'라는 책을 읽었어요. 대중가요 가사와 문학 작품을 비교한 책이었어요. 아이유 노래 '좋은 날'과 현진건 소설 '운수 좋은 날'을 비교하는 목차가 재미있었어요. 졸업하기 전에 레드벨벳 노래로 비슷한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 레드벨벳 팬이니까요"
박진우 학생은 1학기가 시작하자마자 학교 게시판에 동아리 '레드벨벳(Red Velvet)' 모집 공고를 올렸다. 박 군은 ▲레드벨벳 가사 분석 ▲레드벨벳 가사 낭송회 ▲레드벨벳 뮤직비디오 재해석 ▲레드벨벳 노래와 문학작품 비교 분석 등을 동아리 활동 계획에 넣었다. 동아리 회원 모집 공고는 SNS에서 폭발적인 화제를 모았다.
현재 레드벨벳 동아리 회원은 10명이다. 고3이 대부분이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지만 모임 출석률은 높다. 학생들은 주기적으로 만나 발제 시간을 갖는다. 레드벨벳 영상과 학습 내용을 연결한 발표 하면 된다. 어떤 과목이든 제한은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을 고르는 게 중요하다.
조지환 군은 기계공학과 진학을 꿈꾸는 이과생이다. 물리, 화학 등 과학 분야를 주도적으로 맡아 발제하고 있다. 조 군은 "공부와 덕질을 동시에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라고 말했다.
"물리 공부를 할 때 레드벨벳 '러시안 룰렛' 영상이 제일 좋아요. 멤버끼리 밀고 당기고 떨어지는 장면이 많거든요. 영상을 보며 물리 개념을 복습해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직접 교과 개념서를 만드는 느낌으로 공부해요. 국어, 사회, 과학 다 마찬가지죠"
박진우 군은 레드벨벳 동아리를 운영하며 철학과 미학에 관심이 생겼다. 박 군은 레드벨벳 뮤직비디오 '덤 덤(Dumb Dumb)', '행복(Happiness)' 등에 재미있는 상징이 많이 숨어있다고 말했다.
"수능특강 국어 예술 지문에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라는 개념이 나와요. 데페이즈망은 간단히 말해 초현실주의 미술 기법을 말해요. 형식은 다양해요. 친숙한 사물의 크기를 과장하거나 변화를 주기도 하고, 시간이나 공간을 비틀기도 해요. 레드벨벳 뮤직비디오 '행복'을 보면 '데페이즈망' 개념을 빌려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이 많아요. 하늘 위에 오토바이가 날아다니는데..."
◈ "직접 '굿즈' 만들어요" 동탄중앙고 트와이스 동아리
경기도 화성 동탄중앙고에도 아이돌 동아리가 있다. 2학년 백승욱(17) 군이 만든 '채널 원스(CHANNEL ONCE)'다. 트와이스 공식 팬클럽 '원스'에서 이름을 따왔다. 백 군은 "장난으로 시작한 동아리인데 일이 커졌다"라고 말했다.
"평소 아이돌 '덕질'을 하는 동아리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장난삼아 학교에 트와이스 동아리 모집 공고를 올렸죠. 함께 웃고 즐기자는 생각이었어요. 그게 SNS에 퍼진 거예요. 갑자기 엄청나게 주목받았어요. 수천 명이 리트윗했거든요. 기분이 좋았죠"
백승욱 군은 "이때다" 싶은 마음에 친구들을 모집했다. 이 정도로 반응이 좋다면 동아리를 만들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명이 넘는 학생이 모였다. 백 군은 친구들과 학교 승인을 받는 데 성공했다. 당시 동아리에 들어온 유정현(17) 군은 "교감 선생님 지지가 큰 힘이 됐다"라고 말했다.
"교감 선생님이 전체 방송을 틀고 이거(트와이스 동아리) 하는 애들 다 오라고 하셨어요. 혼날 줄 알고 긴장했거든요. 교복까지 (단정하게) 차려입고 들어갔어요. 근데 선생님이 우리를 칭찬하더라고요. 맛있는 것도 주시고"
동탄중앙고 트와이스 동아리 학생들도 '덕질'과 학교생활을 연결하는 데 관심이 많다. 이들은 '학교 생활 굿즈'를 통해 연결 고리를 찾았다.
지난 6월 '채널 원스'는 트와이스 분필 상자를 만들었다. 선생님들이 분필을 더 편하게 사용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채널 원스'는 트와이스 로고가 적힌 종이로 분필을 싼 다음 칠판 밑에 두었다. 선생님과 친구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채널 원스' 학생들은 자체 영상도 제작한다. 예능프로그램 포맷을 딴 영상이 많다. 독자적인 유튜브 채널도 있다. 지난 24일에는 '트와이스 능력 고사' 영상이 올라왔다. 주제는 '내가 알고 있는 트와이스 지식'이었다. 해당 영상은 트와이스 팬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다.
동아방송예술대 엔터테인먼트경영과 심희철 교수는 트와이스, 레드벨벳 등 아이돌 동아리 열풍에 대해 "아주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기성세대는 팬덤과 학교가 구분돼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이돌 팬 활동을 굳이 '학교 안에서까지' 해야 하냐고 묻겠죠.
아이돌 동아리는 학생들에게 '자기 효능감'을 주는 활동입니다. 재미와 의미를 함께 주잖아요.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과학, 인문학, 예술, 미디어 등 여러 분야와 접목하는 거죠. 일선 학교를 보면 입시라는 제약 때문에 동아리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아이돌 동아리가 그러한 한계와 맞선다고 생각합니다"
◈ 생기부, 자소서에도 등장하는 아이돌
아이돌 동아리 활동은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학생들은 아이돌 '덕질' 경험을 미래 설계나 대학 입시에까지 활용한다.
백승욱 군은 신문방송학과 진학이 목표다. 꿈은 예능프로그램 PD다. 백 군은 현재 '채널 원스' 영상 제작과 '굿즈' 제작을 총괄한다.
"트와이스는 제 꿈과 연결돼요. 지금 경험이 저 자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 확신해요. 직접 영상도 만들고 프로그램도 짜니까요."
동탄중앙고 이유석(17) 군은 "모모(트와이스 멤버)가 내 꿈을 찾아줬다"라고 말한다. 이유석 군은 광고심리학과 재학을 꿈꾸고 있다. 이 군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시나리오, 영상 제작에 큰 관심이 생겼다"라고 털어놓았다. 김태우(17) 군도 "트와이스를 좋아하며 '패션 디렉터'라는 장래희망을 더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게 됐다"라고 말했다.
송천고 김강현 군은 엔터테인먼트산업에 관심이 많다. SM 등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입사하겠다는 포부가 있다. 레드벨벳 동아리 활동을 하며 아이돌 업계 진출을 위한 경험을 쌓고 있다.
김강현 군 생활기록부에는 '레드벨벳 뮤직비디오 해석 활동을 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관련 학과 진학을 위해 생활기록부도 '최애' 아이돌로 채운 셈이다. 기계공학과를 지망하는 조지환 군 생활기록부에는 "레드벨벳 ‘루키’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뮤직비디오 속도, 가속도, 힘의 평형 등 물리 법칙을 찾아 발표했다"라는 문구도 있다.
"처음에는 생활기록부에 이런 말이 적힐 줄 몰랐어요. 선생님께서 반대하셨거든요. 아이돌 동아리가 마냥 놀기만 하는 곳인 줄 아셨나 봐요. 제가 활동한 걸 다 보여드렸어요. 점점 마음을 열고 저를 지지해주시더군요"
전국진학지도협의회 정책국장 최승후 교사는 "아이돌 팬 경험을 대학 입시에 활용하는 학생이 부쩍 늘었다"라며 "아이돌 노래나 퍼포먼스를 보면 사회 현상, 사회 이슈를 겨냥한 게 많다. 그런 콘텐츠를 분석하다 보면 비판적 사고력을 기를 수 있다"고 말했다.
최 교사는 비평이나 토론, 영상 촬영 경험이 입시에서 하나의 포트폴리오가 된다고 했다. 그는 "대학에서는 이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한 학생들을 높게 평가한다"고 덧붙였다.
◈ "아직 편견도 있어요" 아이돌 팬덤에 대한 인식 전환 필요
동탄중앙고 '채널 원스' 학생들은 동아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아리이기 때문이다. 김태우 군은 "우리가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물론 처음부터 '잘 나가는' 동아리였던 건 아니다. 유정현 군은 "처음에는 신입생 모집이 잘 안 됐다"라며 "들어오면 놀림당한다고 생각하는 친구도 있었다"라고 털어놓았다.
송천고 레드벨벳 동아리도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 있다. 김강현 군은 "아이돌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낮잡아보는 시선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박진우 군은 "어른뿐 아니라 또래 아이들이 비슷한 시선으로 볼 때가 있다"라고 고백했다.
"친구 사이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있어요. 아이돌 좋아한다고 하면 이해를 못 해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친구도 있어요. 우리는 나름대로 공부랑 연결해서 이것저것 재미있게 하고 있는데"
아이돌 음악에 대한 편견 때문에 동아리 창립을 표기한 학생도 있다. 서울 A고 재학 중인 강하연(18) 양은 "또래 친구들 편견이 크게 작용했다"라고 말했다.
"선생님들 반응은 나쁘지 않았는데 친구들 때문에 상처받았어요. 아이돌 음악 그거 그냥 '훅 송' 아니냐고 비꼬는 애들이 있었거든요. 우리 학교에 힙합 동아리도 있고 클래식 음악 동아리도 있거든요. 그 친구들은 그런 소리 안 들어요"
심희철 교수는 "우리나라는 대중문화를 일종의 '군중심리'로 해석하고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아이돌 동아리가 좋은 연결 고리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