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순방' 포기한 출입기자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2017-10-1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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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 드리기 조심스럽지만, 대한민국 '적폐' 가운데 하나는 청와대 춘추관에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저는 청와대 춘추관에 출입한 지 두 달이 돼 가는 청와대 등록기자입니다.
"정원이 꽉 찼다"는 춘추관 1층 기자실을 사용할 수 없어 '칸막이 없는' 2층 브리핑룸에서 기사 작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저처럼 춘추관에 새롭게 출입한 청와대 등록기자들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비록 정식 기자실을 사용 못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지난 8월 더 많은 언론사에게 춘추관 문호를 개방한 점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청와대 등록기자 '신분'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뉩니다.
대통령님이 참석하는 행사나 회의를 전담 취재할 수 있는 '풀 기자단'과 여기에 속하지 못한 일명 '비(非)풀 기자'가 있습니다.
풀 기자단은 일부 언론사 기자들이 자체적으로 꾸린 일종의 기자 모임입니다. 대부분 특정 기자실에 오랫동안 출입하고 있는 '터줏대감' 언론사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기자실에서 적지 않은 혜택을 누리는 경우도 있어 일각에서 "특권적 모임"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습니다.
보통 풀 기자단 가입은 기존 풀 기자단 소속 등록기자들이 가입 희망 매체를 찬반 투표로 결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하지만 새롭게 풀 기자단에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고 합니다. 풀 기자단의 '풀'은 카르텔을 뜻하는 영단어 'Pool'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현재 청와대 춘추관에는 140여 개 언론사에서 나온 기자 30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풀 기자단에는 80여 개 언론사가 소속돼 있고, 나머지 60여 개 언론사 기자들은 비풀 기자라고 합니다. 비풀 기자 가운데 30여 개 언론사는 지난 8월 새롭게 출입했습니다. 춘추관에서 출입기자 현황을 공개하지 않아 이는 기자들 사이에서 알려진 '대략적인' 수치입니다.
저는 춘추관에서 풀 기자단에 들어가지 못한 비풀 기자 신분입니다. 그래서 대통령님을 가까이서 취재하고 싶어도 여건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대통령님 주요 일정에 대한 동행취재는 오직 풀 기자단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일부 청와대 등록기자 사이에서 비판적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이익을 우려해 '침묵'하는 등록기자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동료 기자로서 그 심정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춘추관에서 이런 기자실 문화는 '오랜 관행'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최근 춘추관에서는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 취재 신청을 받았습니다. 대통령님이 동남아시아를 무대로 펼칠 양자·다자 정상외교를 지켜보고자 저 역시 순방 취재 신청을 했습니다.
이후 춘추관 관계자는 전화를 걸어 "대통령 전용기 좌석이 모두 차서 자리가 없다"며 "기자 본인이 민항기 티켓을 구해 대통령 순방 국가로 와야 한다"며 참가 의사를 다시 물었습니다.
동남아 순방 국가인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 3개국을 개별적으로 알아서 이동하라는 것은 '오지 말라'는 얘기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고민 끝에 순방 취재 신청을 포기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지만 대통령 전용기에도 '오랜 관행'이 남아 있습니다. 약 80석인 전용기 내 '기자 좌석'은 청와대 풀 기자단에게 우선권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전용기 내 기자 좌석이 남는 경우가 많지 않아 풀 기자단이 아닌 비풀 기자는 전용기를 탑승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지난 9월 미국 뉴욕 순방 당시에도 전용기 좌석을 배정 받지 못한 비풀 기자 10여 명은 민항기를 타고 이동해야 했습니다.
물론 더 많은 청와대 등록기자가 대통령 순방에 동행하기 위해 전용기를 추가로 구입, 임차하거나 기존 전용기 좌석을 늘리는 일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봅니다.
저와 함께 일하는 청와대 등록기자 A씨는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인정하면서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한정된 전용기 좌석을 '공평하게' 사용할 수 대안이었습니다.
A기자는 "전용기에 항상 청와대 풀 기자단만 우선 배정하지 않으면 이런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며 "경우에 따라 청와대 춘추관이 전체 언론사 가운데 그동안 한 번도 전용기에 탑승하지 못한 언론사 기자에게도 우선권을 주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A기자는 "그것도 안 된다면 아예 공평하게 제비뽑기를 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고 했습니다.
청와대 비풀 기자는 전용기뿐만 아니라 순방 현지에서도 취재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대통령 순방 일정 동행취재는 청와대 풀 기자단만 할 수 있습니다. 비풀 기자는 현지 프레스센터에 머물며 풀 기자단이 취재한 내용을 토대로 기사를 작성해야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님이 제 편지를 '실제로' 읽으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약 두 달을 보낸 청와대 춘추관에는 '오랜 관행'이 당연한 질서처럼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기자실 문화에 순응할 수도 있지만, 합리적인 기자실 문화를 위해 언젠가 반드시 대통령님이 해결해 주셔야 할 과제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얘기 드리기 조심스럽지만, 대한민국 '적폐' 가운데 하나는 지금 청와대 춘추관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