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전용' 콘돔 자판기가 한국에 등장했다
2017-03-1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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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713번지에 설치돼 있는 콘돔 자판기/ 이하 위키트리 "만 19
"만 19세 미만만 사용 가능하다는 뜻이 맞아요?"
지난 11일 오후 7시쯤 서울 이태원동 경리단길 성인용품 가게 1층 앞. 길을 가던 유모(남・30) 씨가 가게 앞에 설치된 '콘돔 자판기'를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콘돔 자판기여서가 아니다. 자판기에 쓰여진 "19세 이상 성인은 사용을 지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문구 때문이다.
유 씨는 민망한 듯 웃으며 "청소년만 사용 가능한 자판기가 있을 줄 몰랐다"고 했다. 비슷한 시각 길을 지나던 이모(여・21)씨도 '이브(Eve)'라는 초록색 영어 문구가 적혀 있는 이 콘돔자판기를 보고 "이거 청소년들이 쓰는 거냐? 지금까지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콘돔 자판기에 "누구나 안전하게 사랑할 권리가 있습니다. 콘돔은 성인용품이 아닙니다"라고 적혀 있다.
콘돔 자판기 사용법이 적혀 있다. 동전 투입구에 100원을 넣고 레버를 돌리면 콘돔이 나온다.
높이 130cm, 가로 60cm 정도 크기의 철제 자판기에는 "청소년이 아닌 경우, 콘돔은 성인용품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 간다", "명시적 동의, 피임, 상호 존중은 안전한 사랑의 필수적 3요소" 같은 문장들이 촘촘히 적혀 있었다.
이 '청소년용' 콘돔 자판기는 사회적 기업 '인스팅터스'가 만들었다. 한국에선 첫 시도다. 지난달 6일부터 현재까지 서울 강남구, 용산구, 광주광역시 동구, 충청남도 홍성군 등 4곳에 설치됐다.
콘돔 구매에 어려움을 겪는 만 19세 미만 청소년들이 콘돔을 쉽게 구입하게 하자는 게 취지다. 가격은 100원에 2개로 저렴하다. 시중 판매되는 콘돔 가격은 개당 500~3000원 선이다. 2015년 설립된 '인스팅터스'는 유기농 원료로 제작하고 화학물질을 첨가하지 않는 콘돔을 만드는 사회적 기업이다. 청소년, 동성애자 권리를 신장하기 위해 여러 프로젝트를 펼쳐왔다.
성민현 인스팅터스 대표는 "성에 대해 공부를 하면 할수록 무조건 금기시하고 부끄러워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면서 "온라인으로 신청하는 청소년들에게 콘돔을 보내주는 프로젝트를 하다가 오프라인 자판기까지 마련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콘돔 자판기를 설치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사회적 인식이었다. 법적으로 만 13세 이상이면 성적 자기결정권이 인정돼 자기 의지에 따라 성적 행동을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만 13세 이상 청소년이 콘돔을 구매하는 건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중장년층 대부분은 청소년에게 콘돔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스팅터스 마케팅부 이기쁨 대리는 "자판기를 설치하려면 건물주, 인근 상가 점주를 설득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말세다'였다"고 토로했다.
청소년용 자판기 설치 제안을 받아준 건 그나마 개방형 성인용품 판매업소 업주들이다. 서울 강남구, 용산구, 광주광역시 동구에 세워진 콘돔 자판기는 모두 성인용품 가게 앞에 설치됐다. '평등한 성'을 마을 슬로건으로 하고 있는 충남 홍성군에선 마을 만화방에 자판기를 설치할 수 있었다.
이기쁨 대리는 "콘돔을 권장하면 성적 문란을 조장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더라"라며 "콘돔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성관계를 권장하는 것은 아니지 않냐"고 지적했다.
"청소년에게 무슨 콘돔이 필요하냐"는 성인들 인식과 달리 적지 않은 청소년들이 콘돔을 필요로 한다.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2016 청소년 건강행태 온라인 조사'에 따르면 중고교생 중 '성관계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이는 전체의 5%였다. 학교에서 조사하는 만큼 학생들이 솔직하게 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 실제 비율은 이보다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경험이 있는 청소년 중 절반은 피임을 하지 않고 있다.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2016년 청소년 건강행태 온라인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성관계 경험자 중 남학생 52.0%, 여학생 51.8%만이 성관계시 피임을 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피임을 하지 않는 주된 이유는 피임 기구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약국, 편의점, 마트에서 콘돔을 구매할 수 있지만 대부분 어른들 시선이 두려워 엄두를 내지 못 한다.
서울시 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이 모(18) 군은 "콘돔을 사는 것이 부끄럽고 두려워 지하철역 자판기를 이용해 왔다"고 고백했다. 그는 "지하철역에서도 왠지 눈치가 보인다. 많은 친구들이 이런 문제로 피임 기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인 권 모(18) 군은 "법적인 문제가 없다고 해도 주변에서 떳떳하게 편의점에 가서 콘돔을 사는 친구는 못 봤다"며 "콘돔을 쉽게 구하지 못 하니 대부분 '노콘(콘돔 없이 성관계를 맺는 것)'을 한다"고 밝혔다. 권 군은 "노콘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판매자도 청소년이 콘돔을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 중구에 위치한 한 편의점 점주는 관련 사실을 접한 뒤 깜짝 놀라며 "청소년도 콘돔을 살 수 있냐"고 물었다. 이 점주는 "본사에서도 그런 지침을 알려주지 않아 몰랐다. 콘돔을 사러 오는 청소년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콘돔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면 피임을 하지 않는 청소년들이 줄어들까? 청소년 10명에게 '인스티텅스'가 설치한 콘돔 자판기 사진을 보여주며 자판기를 이용할 의향이 있냐고 묻자 모두 "청소년 전용 자판기라면 떳떳하게 살 수 있을것 같다"고 말했다.
신모(17) 양은 "서구권 국가에서는 양호실에서도 콘돔을 구할 수 있지 않냐"며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가까운 곳에서 안전하고 마음 편하게 구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물리적 접근성과 함께 심리적 접근성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교육 전문가 공감성교육 이석원 대표는 "학교에서 피임 기구에 대해 가르치지 않아 청소년들이 콘돔 사용법을 모른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청소년들을 만나면 늘 '학교에서 성교육을 어떻게 받았냐'고 묻는데 99%가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 했다고 답한다"고 했다.
반 모(18) 군은 "학교에서 피임 기구 사용법에 대해 배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털어놨다. 반 군은 "성교육을 위한 시간이 충분하게 마련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교사들이 아직도 '야동은 나쁜 것'정도로만 가르친다"고 말했다.
김 모(17) 군은 "성인이 청소년의 성에 대해 간섭할 권리는 없지만 올바른 교육, 조언을 해줄 의무는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현실은 완전히 반대다. 성인들이 간섭만 하고 교육이나 조언은 해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석원 대표는 "성교육을 할 때 학생들한테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안전한 성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콘돔이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치는데 이런 과정에서 학생들이 성관계를 더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실제 사례를 소개했다. 이 대표는 "피임에 대한 교육을 받은 한 학생이 성관계를 맺으려다가 더 준비가 됐을 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 않았다더라"라며 "피임을 가르치면 더 쉽게 성관계를 할 것이라는 인식과 반대되는 결과"라고 했다.
'인스팅터스'는 청소년 콘돔 자판기 설치를 계속 해나갈 예정이다. 이기쁨 대리는 "올해 상반기에 총 8대를 설치하는 게 목표다. 특히 만화방, PC 방 등 10대 청소년이 자주 찾는 곳에 자판기를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