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풍쟁이에 여왕 특급 칭찬까지…역사는 요란하지만 빈민촌을 부촌으로 만든 차
2025-04-24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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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농약에 벌레가 먹은 찻잎만 고집한다는 독특한 찻잎 고집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동양에서 온 아름다운 여인' 같다며 'Oriental Beauty'(동방미인)라는 이름을 하사한 것으로 알려져 유명세를 얻고 빈민가를 부촌으로 만든 대만의 차가 있다. 무농약인 데다가 반드시 벌레가 먹어야 한다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 유기농 차의 스토리가 이목을 끌고 있다.
'동방미인', 별칭부터 화려한 이 차의 이름은 오룡차다. 대만이 종주국이며 벌레 먹은 찻잎으로 만들어진다. 오룡차는 상처가 생겨 정상적으로 발육하지 못한 찻잎과 붉게 변색되고 구부러져 못생긴 찻잎으로 만들어진다. 사실 우리가 찻집에서 자주 접하는 우롱차도 오룡차다. 오룡의 표준 중국어 발음이 우롱이니 말이다.
오룡차는 본래 중국 복건성(福建省) 무이산(武夷山) 지역에서 유래한 반발효차(청차, 靑茶)로,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한 차 제조자가 차를 만들던 중 검은 뱀이 나타나 차나무를 휘감고 있는 모습을 보고 도망쳤다 돌아와 보니 찻잎이 부분적으로 발효돼 있었고 이 차를 만들어 마시니 맛은 일품이었으나 중국인들이 뱀을 싫어하고 용을 좋아하는 특성을 고려해 '오룡'으로 미화해 오룡차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과, 명나라 말기 복건성 안계현에 살던 '용(龍)'이라는 별명의 인물은 얼굴이 검은 탓에 '오룡'이라 불렸는데 어느 날 피곤해 찻잎을 따다 방치한 채 잠들었다가 다음 날 일어나 찻잎이 변색돼 발효가 진행된 것을 보고 이를 차로 마셔보니 맛이 뛰어나다는 것을 깨달은 뒤 반발효차(오룡차)를 개발하며 차의 이름을 자신의 별명에서 따왔다는 설이다. 오룡차라는 명칭이 정착된 건 약 150년 전으로, 비교적 최근에 확립된 셈이다.
대만의 오룡차 역사는 약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나라 시대 중국 복건성에서 이주해 온 '가조'가 대만 대북현 어갱에 차나무를 심은 것이 시초로 기록돼 있다. 또 남투현 녹곡향 동정산에 살던 임봉지가 복건성 무이산에서 차나무를 들여와 심은 것도 대만 오룡차 발전의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대만은 복건성의 차나무 품종과 제다법을 도입해 본격적으로 오룡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특히 안계 철관음 품종을 바탕으로 품종 개량과 제조 기술이 발전했고 일본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이 복건성의 차 전문가를 초빙해 대만 오룡차의 품질을 크게 향상시키기도 했다.

대만 오룡차는 고산지대의 청정한 환경에서 재배돼 향이 맑고 과일 향이 도는 것이 특징이다. 동정오룡, 대우령오룡, 백호오룡 등 다양한 지역별 명차가 탄생했고 19세기 말부터 미국과 유럽에 수출하며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 대만은 본격적으로 고품질 차 생산에 집중하며 고급 오룡차는 내수 소비에 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대만의 오룡차는 세계 오룡차 생산량의 약 20%를 차지하며 '차의 샴페인'으로 불릴 정도로 그 품질과 향미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오룡차는 녹차와 홍차의 중간 단계인 반발효(85% 산화)차로, 발효 정도와 제조 방식에 따라 다양한 풍미를 가진다. 난초와 자스민, 허니서클 등 꽃향과 복숭아, 살구, 감귤, 자두 등 과일향, 아몬드, 밤, 토스트 곡물 등 견과류와 캐러멜, 꿀, 나무, 스모키한 로스팅향, 천연 단맛, 미네랄, 흙 내음 등을 느낄 수 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신선하고 풀내 나는 녹차와 깊고 진한 홍차의 중간 맛이라고 볼 수 있다. 잎 모양은 길게 말린 형태나 작은 구슬 모양이다.
오룡차는 건강상 효능도 뛰어나다. 폴리페놀과 EGCG, 테아플라빈, 테아루비긴 등 풍부한 항산화 성분이 세포 손상을 방지하고 노화 예방에 도움을 줘 항산화 효과가 뛰어나다. 또 지방 분해와 에너지 대사를 촉진해 체중 감량과 비만 예방해 효과적이라 체중 관리에도 좋으며 혈당과 인슐린 저항성을 개선해 당뇨병 위험도 줄인다. 또한 혈중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을 줄이고 동맥경화 및 심혈관 질환까지 예방하는 데다가 L-테아닌 등 아미노산이 뇌 기능을 개선하고 집중력을 향상한다. 스트레스와 불안을 완화하고 수면 질까지 개선하는 건 덤이다. 면역력이 약할 때도 오룡차가 제격이다. 플라보노이드가 면역 기능을 높이고 항균 작용을 도와 감염을 예방하기 때문이다. 소화 기능을 개선하는 까닭에 대만 사람들은 습관처럼 식전·식후 오룡차를 즐겨 마시기도 한다.
다만 빅토리아 여왕이 오룡차를 마시고 '동방미인'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는 설은 유명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대만차엽개량장 책임자인 오진탁이 해당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대만 국무총리 위궈화의 동의를 얻어 1982년부터 사용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재미있는 설도 있다. 오룡차는 '허풍쟁이' 차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100여 년 전 묘율현 두분에 사는 건망증이 심한 차농은 농약을 살포하는 시기를 놓쳐 소록엽선이 창궐해 어린 찻잎을 모두 갉아 먹어 버리자 하는 수 없이 상품성이 떨어진 찻잎으로 만든 차를 시장에 가져갔다. 아무도 이 차를 사려 하지 않았으나 단 한 명이 우연히 차 맛을 보고 전량을 수매했다. 바로 영국 차 상인이었다. 집으로 돌아간 차농은 마을 사람들에게 이 놀라운 소식을 신나게 떠벌렸으나 당연히 아무도 믿지 않았고 허풍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건망증이 심한 차농이 겪은 일은 되풀이됐다. 대만 수도 타이베이 남쪽 80km에 있는 신죽현의 북포향 객가 마을에 살던 강아신이 바로 그 불쌍한 차농의 오명을 씻겨준 주인공이다. 1985년 4월 17일부터 대만을 통치했던 일본 식민지 초기 열린 차 전시회에 벌레 먹은 찻잎으로 가공한 차를 출품한 강아신은 "대만 총독부에서 차를 고가에 전량 구매했다"라고 마을에 돌아가 동네방네 자랑했지만 이웃들은 역시 헛소리로 치부했다. 하지만 며칠 후 신문에 이에 관한 기사가 실리자 강아신의 헛소리는 사실로 드러나며 차는 금방 유명해졌다.
이처럼 역사가 깊고 건강에도 좋은 오룡차의 맛을 최대한 즐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오룡차는 90도 이상의 뜨거운 물로 우리면 제맛이 잘 우러난다. 미네랄이 적은 연수를 사용하면 차의 향과 맛이 더 깔끔하게 살아난다.
찻잎은 우선 다관(찻주전자)에 찻잎을 반 정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바로 우려내어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처음에는 찻잎을 적게 넣고 연하게 우려 마시며 점차 농도를 조절해 자기만의 맛을 찾는 것이 좋다. 오룡차는 여러 번 우려도 향과 맛이 오래 지속되므로 2~3회까지 우려 마실 수 있다.
차를 그냥 마시는 것보단 차를 만드는 과정 자체를 음미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차를 마시기 전엔 먼저 찻물의 빛깔을 감상하고 뚜껑에 맺힌 향을 맡아보자. 이렇게 하면 오룡차의 풍부한 향과 색, 맛을 모두 즐길 수 있다.
다만 주의할 점은 찻잎이 냄새를 잘 흡수하므로 서늘하고 냄새가 없는 곳에 보관해야 오룡차 고유의 향미가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