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건너왔는데…요즘 한국 MZ 사이서 열풍이라는 뜻밖의 '문화'
2025-04-14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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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원부터 시작해 고급 상품은 1만 7,000원대 이르러
동전을 넣고 레버를 돌리면 ‘찰칵찰칵’ 소리와 함께 아크릴 소재의 반투명 캡슐이 ‘퐁’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안에는 작은 장난감이나 미니어처가 들어 있다. 일본에서는 이 소리를 따라 ‘가챠가챠’(ガチャガチャ)로 불리는 이 자판기 캡슐 완구 문화, 일명 ‘가챠’가 최근 한국 MZ세대 사이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예전엔 주로 어린이들이 즐기던 장난감 자판기였지만, 요즘은 20~30대를 중심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키덜트 문화와 수집 취향이 확산되며 가챠 자판기는 홍대, 강남, 명동 등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에 전문 매장으로 자리 잡았다. 매장 한쪽 벽을 가득 채운 가챠 자판기 앞에는 캡슐을 고르며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설렘을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가챠의 매력은 뽑기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손에 쥐게 될 결과물을 모른다는 점이 오히려 기대감과 긴장감을 유발한다. 캡슐 안에 들어 있는 건 단순한 장난감이지만, 그 안에는 ‘소유’보다 ‘경험’에 초점을 맞추는 요즘 소비자들의 정서가 담겨 있다. 뽑기라는 물리적 행위를 통해 구매 이상의 ‘스토리’를 소비하는 셈이다.
홍대 인근 한 매장에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로봇, 곤충, 음식 미니어처, 생활 소품 등 다양한 종류의 가챠가 진열돼 있다. 가격대는 4,000원부터 시작해 고급 상품은 1만 7,000원대에 이른다. 또 다른 매장에서는 일부 인기 애니메이션 캐릭터 가챠가 2만 원대에 판매되기도 한다. 매장마다 구성과 가격이 달라 소비자들은 이를 비교하며 '가챠 투어'를 즐기기도 한다.
가챠는 사실 꽤 오랜 역사를 지녔다. 일본에 캡슐 자판기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65년이다. 당시 미국산 껌 자판기를 들여온 일본 페니상사가 도쿄 쿠라마에 인근 볼링장에 자판기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로 알려져 있다. 당시엔 껌이나 초코볼 등을 담아 팔았지만, 이후 장난감 중심으로 진화하며 일본 고유의 캡슐 완구 문화로 정착했다.
최근 일본에서도 ‘가챠’는 제5의 붐을 맞이했다. 지난 11일 일본완구협회에 따르면 2010년 약 300억 엔 규모였던 캡슐 완구 시장은 2021년 400억 엔을 넘어섰고, 2023년에는 무려 640억 엔에 달했다. 불과 10여 년 만에 두 배 이상 성장한 수치다. 일본 내에서도 가챠 전문 브랜드들이 공격적인 점포 확대에 나서며 시장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배경에는 ‘고토(コト·경험) 소비’가 자리 잡고 있다. 물건 그 자체보다 경험이나 시간을 소비하는 경향을 뜻한다. 가족과 놀이공원을 방문하는 행위가 단순한 입장권 구매를 넘어 ‘추억’을 만드는 활동이듯, 어떤 아이템이 나올지 모르는 가챠 뽑기 역시 설렘과 놀라움이라는 감정을 사고파는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SNS가 이런 흐름에 불을 지폈다. 요즘 젊은 세대는 가챠 뽑기 결과를 인증샷으로 남겨 공유한다. 해시태그와 쇼트 영상 등으로 연결된 온라인 커뮤니티 안에서 이들은 결과를 공유하고, 희귀 아이템을 수집하며 또 다른 만족감을 얻는다. 뽑기라는 행위는 단순한 소비를 넘어서 또래 간의 교류와 자랑, 놀이의 수단이 되는 셈이다.
가챠는 어쩌면 ‘물건은 넘치지만 경험은 부족한 시대’에 그 공백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물건 하나로 추억과 이야기, 만족감을 담아내는 이 소소한 문화는 지금, 한국 MZ세대의 새로운 여가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간단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 캡슐 속 놀이는 소비의 정의를 조용히 바꾸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