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포크라테스가 추앙할 정도…꽃봉오리로 만든 훈제 연어의 짝꿍 향신료
2025-04-13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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짭짤하면서 톡 쏘는 맛이 중독적인 향신료
기름진 생선의 느끼함을 잡아주면서 입맛도 돋게 하는 마법의 향신료의 효능과 유래를 알아보자.

훈제 연어를 떠올릴 때 빠질 수 없는 재료 중 하나가 바로 케이퍼다. 초록빛의 작은 구슬처럼 생긴 이 향신료는 짭짤하면서도 새콤한 풍미로 훈제 연어의 기름진 맛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케이퍼가 사실은 꽃이 피기 전의 봉오리라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케이퍼는 '케이퍼나무(Capparis spinosa)'라는 식물의 꽃봉오리로, 완전히 피기 전의 아주 어린 상태에서 채취해 소금이나 식초에 절여 향신료로 활용된다.
케이퍼의 역사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자생하던 케이퍼는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인류가 식용해 왔던 식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이미 약용 및 식용으로 널리 쓰였다. 히포크라테스는 케이퍼를 먹으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로마인들은 그것을 소화제로 활용하기도 했다. 케이퍼가 향신료로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 지중해 요리에서 음식의 풍미를 더하는 재료로 쓰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특유의 톡 쏘는 맛과 짠맛, 그리고 절임에서 오는 산미가 육류나 생선 요리와 훌륭하게 어우러져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케이퍼가 재배되기 시작한 건 20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이탈리아 리구리아, 풀리아, 캄파니아, 시칠리아 등지에서 재배되는데 가장 품질이 좋은 케이퍼가 생산되는 곳은 판텔레리아라는 시칠리아 서쪽의 작은 섬이다. 케이퍼와 건포도로 만든 디저트 와인이 특산품인 이 섬은 봄에 비가 많이 오고 여름은 뜨겁고 건조해 케이퍼를 기르기 최적의 조건을 가졌다. 미네랄이 풍부한 화산토양이라는 점도 케이퍼의 품질 수준을 남다르게 한다.
케이퍼 수확은 상당히 수고스럽다. 낮이 되면 기온이 올라 꽃봉오리가 금세 피어나기 때문에 서늘한 아침에 빨리 따야 한다. 또 덤불이 금방 자라 매일 부지런하게 가지치기도 해야 한다. 수확하고 난 뒤에도 말리고 절이는 과정을 거쳐야 하니 가격이 저렴할 수가 없다.

훈제 연어와 케이퍼가 만나게 된 배경에는 유럽 북부와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식문화가 있다. 연어는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서 귀중한 단백질원이었으며 보존을 위해 훈제하는 방식이 발달했다. 훈제 연어는 특유의 풍미와 기름진 질감이 특징인데 이를 상쇄하고 균형을 맞춰줄 재료로 짠맛과 산미가 강한 케이퍼가 자연스럽게 곁들여지게 됐다. 이 조합은 점차 유럽 전역은 물론 세계 각지의 고급 요리로 자리 잡으며 케이퍼를 대중적인 향신료로 만들었다.
케이퍼는 맛뿐 아니라 건강적인 효능도 무시할 수 없다. 항산화 물질이 풍부해 세포 노화를 억제하는 데 도움을 주며 폴리페놀과 루틴 같은 성분은 혈액순환을 개선하고 심혈관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비타민 K와 철분이 포함돼 있어 뼈 건강과 빈혈 예방에도 효과적이다. 항염 효과도 있어 관절염이나 염증성 질환 완화에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짠맛이 강한 만큼 나트륨 함량이 높은 편이라 고혈압이나 신장 질환, 골다공증이 있는 사람은 과다 섭취를 피해야 한다.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소량으로 먼저 섭취하는 것이 좋다.
가정에서도 케이퍼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먼저 케이퍼나무에서 아주 어린 꽃봉오리를 채취한 뒤 이물질을 제거하고 깨끗이 씻어 소금물이나 식초물에 절인다. 소금에 절여 1~2주 숙성시키면 떫고 쓴맛이 제거되고 짠맛이 배어 나오며 향이 살아난다. 이후 물에 헹궈 소금기를 뺀 꽃봉오리를 식초나 식염수에 담가 냉장보관하면 집에서도 만든 수제 케이퍼를 즐길 수 있다.
보통은 와인식초나 애플사이더 식초를 사용하며 여기에 마늘이나 허브를 약간 넣어 풍미를 더해도 좋다. 다만 케이퍼나무가 한국에는 자생하지 않기 때문에 씨앗이나 묘목을 구입해 따로 키워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만든 케이퍼는 시판 제품보다 향과 식감이 풍부해 더욱 만족스러운 결과를 줄 수 있다.


케이퍼는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다. 훈제 연어 외에도 크림치즈와 함께 베이글에 곁들이면 담백한 맛과 산미가 조화를 이루며 샐러드에 넣으면 전체적인 맛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피자나 파스타에도 토핑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 타르타르소스나 비네그레트 드레싱의 재료로도 훌륭하다. 안티파스토나 올리브 절임, 절인 양파와 섞어 전채 요리로 활용해도 좋다.
케이퍼는 소량만으로도 강한 존재감을 발휘하기 때문에, 너무 많은 양을 쓰기보다는 요리의 맛을 보조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 절인 케이퍼를 바로 쓰기보다는 흐르는 물에 살짝 씻어 짠 기를 덜어내는 것도 맛을 조절하는 데 중요하다.
꽃이 피기 전의 작은 봉오리가 수천 년의 역사를 지나 오늘날 식탁 위에서 풍미를 더하는 향신료가 됐다. 케이퍼는 단순한 부재료를 넘어 음식의 맛을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작지만 강력한 존재다. 그 맛과 효능, 유래를 알게 된다면 훈제 연어 위에 올려진 작은 케이퍼 하나도 더 특별하게 느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