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돼지로도 만드는데... 원래 한우 최고급 부위로 만들었다는 한국 음식
2025-04-12 08:10
add remove print link
불고기와 뿌리가 같다는 한국 전통음식

얇게 썬 소고기를 달콤짭짤한 양념에 재워 석쇠에 구워낸 한국 전통요리가 있다. 너비아니. 한국 전통 요리의 정수를 보여주는 음식이다. 고기를 넓고 얇게 저며 부드럽게 구워내는 너비아니는 오랜 세월 한국인의 밥상을 풍성하게 장식해왔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시작된 너비아니는 오늘날까지도 그 맛과 멋을 이어가며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대표적인 한식 메뉴로 자리 잡았다.
너비아니의 역사는 깊다. 고구려 시대의 맥적(貊炙)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맥적은 고기를 구워 먹는 요리다. 너비아니의 조상 격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너비아니는 궁중 요리로 발전했다. 특히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던 고급 요리였다. 너비아니라는 이름은 고기를 넓고 얇게 썰었다는 뜻에서 비롯됐다.
조선 후기 문헌인 ‘시의전서’에는 너비아니가 상주와 경상도 지역의 요리로 기록돼 있으며, 당시 이미 전국적으로 퍼진 요리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까지는 주로 궁중과 양반가에서 즐겼지만, 후기에 이르러 조리법이 민간에 퍼지며 대중화됐다. 임진왜란 이후 궁중 요리사들이 민간으로 흩어지며 너비아니의 제조법이 널리 알려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소고기 유통이 늘어나며 너비아니가 술집 안주로도 인기를 끌었다. 소설 ‘운수 좋은 날’에도 너비아니가 인력거꾼들이 즐기던 안주로 등장한다.
과거 너비아니는 주로 궁궐과 양반가에서 먹었다. 고급 소고기 부위인 채끝을 사용해 정성스레 만들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에겐 쉽게 접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채끝은 소의 허리 부분에 위치한 부위다. 한 마리에서 약 10kg도 안 나오는 귀한 살이다. 식감이 부드럽고 육향이 진해 스테이크나 구이로 적합하다. 마블링은 소의 사육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한우처럼 사료로 키운 소는 마블링이 풍부하고 방목 소는 마블링이 적다. 너비아니를 만들 땐 얇게 썰어 잔칼집을 넣어 부드러움을 더한다. 하지만 오늘날 너비아니는 채끝뿐 아니라 등심, 안심, 목심, 앞다리살 등 다양한 부위로 만든다. 심지어 돼지고기를 사용하거나 냉동 가공육으로 간편하게 조리하기도 한다. 이런 변화는 현대인의 바쁜 생활과 경제적 여건을 반영한다.
한국 식재료의 자부심인 한우는 너비아니의 고급스러움을 더해주는 소다. 한국 토종 소인 한우는 부드러운 육질과 풍부한 마블링으로 유명하다. 1992년부터 시작된 소고기 등급제에 따라 마블링, 육색, 지방색, 조직감 등을 기준으로 1++, 1+, 1, 2, 3등급으로 나뉜다. 특히 1++ 등급 한우는 마블링이 풍부해 고소한 맛이 강하다. 채끝 같은 부위는 한우 특유의 깊은 풍미를 살려 너비아니로 만들 때 최고의 맛을 낸다.
너비아니 만드는 법은 간단하면서도 정성이 필요하다. 전통적인 방법은 소고기를 0.5cm 두께로 얇게 썰어 앞뒤로 잔칼집을 넣는 것부터 시작한다. 칼집은 고기를 부드럽게 하고 양념이 잘 배도록 돕는다. 고기는 청주를 뿌려 핏물을 제거하고 키친타월로 물기를 닦는다. 양념장은 간장, 설탕, 꿀, 다진 파, 다진 마늘, 생강즙, 참기름, 깨소금, 후추로 만든다. 배즙이나 매실엑기스를 넣으면 고기가 더 연해지고 풍미가 깊어진다. 양념장에 고기를 20~30분 재운 뒤, 뜨거운 석쇠나 팬에 굽는다. 센 불에서 앞뒤로 2, 3분씩 구워 타지 않게 주의한다. 구운 너비아니는 잣가루를 뿌려 고소함을 더한다. 쌈장과 상추에 싸 먹기도 한다. 현대에는 오븐이나 에어프라이어를 활용해 기름기를 줄여 담백하게 굽기도 한다.
너비아니는 불고기와 뿌리가 같다. 과거 불고기는 너비아니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 조선시대엔 고기를 얇게 썰어 양념에 재워 구웠지만,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얇게 썬 고기를 국물에 끓이는 현대식 불고기가 등장했다. 너비아니와 불고기는 조리법에서 차이가 생겼지만, 둘 다 고기를 양념해 익히는 방식은 비슷하다. 떡갈비와도 구분된다. 떡갈비는 고기를 다져 모양을 잡지만, 너비아니는 고기를 얇게 썰어 칼집을 내는 점이 다르다.

너비아니는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게 발전했다. 서울식 너비아니는 간장 양념이 강하고 달콤한 맛이 특징이다. 경상도에선 생강과 마늘을 더 많이 넣어 매콤한 풍미를 살린다. 제주에서는 돼지고기로 만든 너비아니도 인기다. 일부 식품 제조사가 냉동 너비아니를 출시하며 가정에서도 쉽게 즐길 수 있게 됐다. 냉동 너비아니는 고기 함량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데, 고급 제품은 한우 채끝을 사용해 전통의 맛을 재현한다.
너비아니는 영양 면에서도 뛰어나다. 소고기는 단백질과 철분, 아연이 풍부해 체력 보충에 좋다. ‘동의보감’에는 소고기가 비장과 위장을 튼튼히 하고 기력을 북돋운다고 기록돼 있다. 양념에 들어가는 배즙과 생강은 소화를 돕고, 참기름은 고소한 맛과 함께 불포화지방산을 제공한다. 다만 마블링이 많은 한우 채끝을 사용할 경우 지방 함량이 높아 적당히 먹는 게 좋다.
너비아니는 현대에도 다양한 자리에서 사랑받는다. 명절 차례상이나 제사상에 오르며, 손님 접대 요리로도 적격이다. 군대 PX에서도 냉동 너비아니가 인기 품목이다. 한식조리기능사 실기 시험에도 포함될 만큼 조리법이 체계화됐다. 집에서 간단히 만들든 식당에서 정갈한 한 상으로 즐기든 간에 너비아니는 한국인의 식탁을 풍요롭게 한다.
너비아니는 단순한 요리를 넘어 한국의 식문화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궁중에서 시작해 민간으로 퍼진 이 요리는 계층과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았다. 채끝 같은 고급 부위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