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자금줄이자 숨은 조력자였던 뜻밖의 한국 음식
2025-04-06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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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한 점에 담긴 독립운동 역사

한국인의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치. 그 붉고 매콤한 자태 뒤엔 단순한 반찬을 넘어선 깊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얼큰한 국물에 밥 한 술 말아 먹을 때마다 느껴지는 정겨움은 김치가 단순히 음식이 아니라 우리의 소울푸드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놀랍게도 이 김치는 독립운동의 숨은 조력자였다. 김치 한 점에 담긴 역사에 대해 알아봤다.
김치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들은 채소를 소금에 절여 발효시키는 법을 터득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는 생존 기술이었다. 고려시대엔 양념이 더해지며 맛과 영양이 한층 풍성해졌다. 조선시대엔 고춧가루가 등장하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붉은 김치가 탄생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기록에 따르면 고춧가루로 물든 김치가 식탁에 올랐다. 이후 한국인의 밥상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지역마다 김치 맛도 달랐다. 남쪽에선 멸치젓으로 감칠맛을 더했고, 북쪽에선 소금 비율을 높여 짭짤함을 살렸다.
이미 조선시대부터 김치는 상업적으로 거래됐다. 김창업의 연행일지(1712)에 실린 이야기가 이를 증명한다. “한 노파가 와서 말하기를, 자기의 부모는 우리나라 사람이며 정축년에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뒤에 자기를 낳았는데, 지금 나이 69세라 하였다. 자기의 어머니는 본시 서울 장의동(藏義洞)에 살았고 아버지는 광주산성(廣州山城) 사람이며, 남편은 영안도(永安道) 태생인데 오래 전에 죽고, 지금은 손녀 하나를 의지하여 사는데, 우리나라 식으로 침채와 장을 만들어 그것을 팔아서 살아가노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김치가 생계 수단으로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김치산업의 현대적 출발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와 맞닿아 있다. 일제는 한국인의 식문화를 억누르려 했지만, 김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생존의 끈이자 저항의 아이콘이 됐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일제는 배추와 고춧가루를 배급제로 통제하며 전통을 뿌리 뽑으려 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은 몰래 김치를 담가 먹으며 문화의 숨을 이어갔다. 1919년 3·1 운동 때 만세를 외친 이들은 감옥에서도 김치를 나눠 먹으며 서로를 다독였다. 상해 임시정부에선 김치가 독립군의 허기를 채우는 주요 식량이었다. 같은 해 하와이 이민자들은 김치를 팔아 독립자금을 모았다. 이처럼 김치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 민족의 열망을 담은 상징이었다.
1920년대 만주 독립군 기지에서 김치는 겨울을 버티는 필수품이었다. 김치 담그기는 생존 전략이자 자금줄이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김치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무기와 물자를 마련했다. 의열단의 김원봉이 김치 판매 수익으로 폭탄을 제작한 기록이 남아 있다. 1930년대 상해와 만주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의 눈을 피해 김치 제조소를 운영하며 비밀 연락망을 꾸렸다. 이때 김치는 암호로도 쓰였다. “김치가 익었다”는 말은 작전 준비 완료를 뜻하는 신호였다. 이렇게 김치의 역할은 민족정신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저항의 도구로 이어졌다.
해방 이후 김치산업은 상업화의 물결을 탔다. 1950년대 한국전쟁 중엔 피난민과 군인들이 김치로 배고픔을 달랬고, 다시 한번 생존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1960년대 경제 개발이 본격화하며 김치 생산은 가정의 부엌에서 공장으로 옮겨갔다. 1970년대엔 일본과 미국으로 수출이 시작되며 김치가 세계 무대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연간 수출량은 200톤 수준이었지만, 해외에서도 매콤한 맛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1980년대엔 김치 공장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1990년대 냉장고 보급은 김치 저장과 유통을 혁신했다. 집집마다 김치냉장고가 자리 잡았다. 2000년대엔 K-푸드 열풍과 함께 김치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2013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현재 김치는 연간 2만 톤 이상 수출되며 전 세계 식탁을 장식하고 있다.
이처럼 김치는 단순한 반찬이 아니다. 삼국시대의 지혜에서 시작해 조선의 맛을 거쳐 독립운동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민족의 숨결이 김치엔 깃들어 있다. 김치 한 젓가락에도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이 들어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