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90%가 한국에 사는데... 한국인은 맛없다며 입도 안 대는 동물
2025-03-26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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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멸종위기종인데 한국에는 넘쳐난다는 동물

밤 깊은 산속, 괴이한 울음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마치 귀신의 절규처럼 들리는 이 소리는 다름 아닌 고라니가 내는 것이다. 전 세계 고라니의 90%가 대한민국에 서식한다는 놀라운 사실은 고라니가 한국에서 얼마나 흔한 존재인지 보여준다. 하지만 고라니는 해외에서는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될 만큼 귀한 존재다. 뱀파이어 사슴이라는 별명을 가진 고라니는 긴 송곳니와 독특한 생태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고라니에 대해 알아봤다.
사슴과 동물인 고라니의 몸길이는 77.5~100cm, 어깨 높이는 42~65cm, 꼬리 길이는 6~7.5cm, 체중은 8~14kg 정도다. 한국에 서식하는 사슴류 중 가장 작다. 수컷은 뿔이 없고 대신 위턱에서 아래로 길게 자란 송곳니가 특징이다. 이 송곳니는 평균 5.5cm, 최대 8cm까지 자라며 입 밖으로 돌출돼 있다. 암컷도 송곳니가 있지만 짧아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독특한 외형 덕에 영미권에서는 뱀파이어 사슴이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 키바노로(엄니 노루)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송곳니는 수컷이 과시 행동이나 서열 다툼, 암컷을 두고 경쟁할 때 사용한다. 새끼 고라니는 생후 3개월까지 꽃사슴처럼 흰 반점이 있지만, 성장하면서 사라진다.
고라니는 노루나 사슴과 자주 혼동되는데, 차이점은 명확하다. 노루는 수컷에 뿔이 있고 엉덩이가 흰색이며, 귀는 뾰족하고 꼬리는 거의 없다. 반면 고라니는 암수 모두 뿔이 없고, 수컷은 송곳니가 돌출돼 있으며, 엉덩이는 흰색이 아니고 귀는 크고 둥글다. 코 주변에 흰 털 띠가 있는 것도 고라니의 특징이다. 사슴과는 계통적으로 더 멀다. 고라니는 고라니과(Hydropotinae)에 속하고, 노루는 노루속(Capreolus), 사슴은 사슴과(Cervidae)에 속한다. 고라니는 약 3000만 년 전 등장해 원시적인 형태를 유지했고, 사슴은 2500만 년 전 뿔을 진화시키며 갈라져 나왔다. 고라니의 송곳니는 사슴의 뿔이 되기 전 공통 조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고라니는 동아시아 고유종이다. 주로 중국 동부와 한반도에 서식한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은 고라니를 멸종위기 등급 ‘취약(Vulnerable)’으로 분류한다. 두 아종이 있는데, 중국고라니(H. i. inermis)는 중국에 약 3000마리, 한국고라니(H. i. argyropus)는 한반도에 45만~75만 마리가 산다. 러시아 극동 일부와 영국에는 자연 이주나 인위적 방사로 소수가 서식한다. 과거 플라이스토세(빙하기 시대), 홀로세(빙하기가 끝난 이후의 시대) 시기에는 티베트, 몽골, 일본, 베트남까지 분포했지만 현재는 대부분 멸종했다.
영국을 포함한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중국에서 들여온 고라니가 외래종으로 정착해 서식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고라니의 개체 수 증가로 인해 농작물 피해와 생태계 교란 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지만, 여전히 보호종으로 관리되고 있다. 영국 정부는 고라니의 서식지를 보호하고, 개체 수를 조절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고라니의 주요 서식지인 습지대를 보호하고, 고라니의 이동 경로를 따라 울타리를 설치해 농작물 피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에 전 세계 고라니의 90%가 사는 이유는 천적의 부재와 환경 조건 때문이다. 한반도에서는 호랑이, 표범, 늑대 같은 상위 포식자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절멸했고, 남은 너구리나 멧돼지는 고라니 개체수를 조절할 만큼 위협적이지 않다. 1970년대 산림녹화 정책으로 숲이 풍성해지면서 먹이와 은신처가 늘었고, 겨울이 온화해져 생존이 쉬워졌다.
고라니는 번식력도 뛰어나다. 임신 기간은 170~210일로, 겨울에 짝짓기를 해 봄에 2~6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다른 사슴류보다 새끼를 많이 낳고 천적이 없어 성체로 자라는 비율이 높다. 한국에서는 개체수가 70만 마리 안팎으로 유지되며, 매년 16만 마리 이상이 사냥되고 3만 마리가 로드킬로 죽는다. 천적이 없으니 인위적 조절이 없으면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연 1.5배 증가율을 가정하면 8년 후 1000만 마리를 넘길 수 있다. 이런 환경은 고라니에게 낙원이나 다름없다. 물가 근처 습지나 갈대숲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수영도 잘해 강이나 호수를 건너는 모습도 목격된다.
한국에서 고라니는 농가에 피해를 주는 유해조수로 지정됐다. 밭작물을 파헤쳐 먹는 식성이 강하다. 적상추, 고추순, 콩잎을 좋아한다. 워낙 농작물을 많이 헤쳐 농민에게 고라니 방지망 설치를 지원할 정도다. 속담에 “산중 벌이해 고라니 좋은 일 했다”는 말이 있을 만큼 농민들에겐 골치 대상이다. 괴상한 울음소리도 유명하다. 영역 방어, 구애, 새끼 보호를 위해 소리를 내는데, 절규나 고성방가처럼 들린다.
고라니는 사냥이 어렵지 않은 동물로 알려졌다. 순간 속도는 빠르지만 지구력이 약해 지치면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고라니가 이렇게 많이 살지만 한국인들은 고라니를 사냥하지 않는다. 고라니 고기를 한국인이 잘 먹지 않는 이유는 맛과 품질 때문이다. 활동량이 많아 지방이 적고 근섬유가 발달해 고기가 퍽퍽하다. 게대가 누린내가 매우 강한 까닭에 한국인 입맛에 맞지 않는다. 사냥 직후 스트레스로 실핏줄이 터지고 상처가 생겨 냄새를 제거하기 어렵다. 즉시 내장을 제거하고 피를 빼면 먹을 만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전문 엽사가 아닌 이상 손질이 힘들다. 구이로는 적합하지 않고, 양념에 재워 불고기나 장조림으로 조리하거나 찌개에 넣어야 그나마 먹을 수 있다. 육회로 먹으면 기생충 위험이 크다. 가죽도 얇고 부스러져 활용도가 낮다. 산업적 가치가 없어 사슴처럼 키우지도 않는다.
고라니는 로드킬로도 악명이 높다. 2022년까지 3년간 2만 9000마리가 차에 치였다. 자동차 전조등에 눈이 마비돼 얼어붙는 본능 탓이다. 경적으로 놀라게 하면 피할 수 있지만, 빛으로는 효과가 없다. 발굽이 아스팔트에서 미끄러져 사고가 잦다. 심지어 독수리가 로드킬 고라니를 먹다 2차 사고로 죽기도 한다. 이처럼 너무 흔해서 한국에서는 동물원도 취급하지 않는다.
역시 흔한 까닭에 고라니는 대중문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영화 ‘부산행’에서 변이체로 나오고, 웹툰 ‘마음의 소리’에서는 빌런으로 활약한다. 게임에서는 로드킬을 빗대 ‘고라니’라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