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굴욕적인 역사가 담긴 음식… 한국에선 소스가 논쟁거리인 '국민 외식'
2025-03-0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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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만든 음식 '탕수육'

짜장면이 한국식 중화요리의 상징이라면 탕수육은 외식 문화를 형성한 한국식 중화요리쯤 되겠다. 탕수육이 추가됨과 동시에 짜장면 한 그릇과는 비교도 안 되는 호사스러운 가족 외식이 되니 말이다.
바삭바삭한 고기 튀김과 새콤달콤한 소스가 결합한 탕수육(糖醋肉·중국명 탕추러우)은 당(糖)과 식초(醋)로 맛을 낸 돼지고기(肉)라는 뜻이다. '달고 신 맛이 나는 고기'라는 의미다.
중국집 주방장의 불 다루는 솜씨를 보려면 탕수육을 보면 된다고 했다. 그만큼 기본 중 기본이 되는 중화요리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탕수육을 즐겨 먹지만, 정작 본고장인 중국에서는 맛보기 쉽지 않다. 탕추(糖醋) 소스 역사가 깊고 다양한 탕추 요리가 있음에도 탕수육처럼 돼지고기에 전분으로 옷을 입혀 튀겨낸 음식은 중국 본토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탕수육이 한국과 일본에서 현지화된 중국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탕수육 유래설이다.

흔히 탕수육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인들이 영국 사람 비위에 맞추기 위해 만들어낸 음식이라고 말한다. 6·25전쟁 중에 탄생한 한국의 돼지국밥이나 부대찌개처럼 탕수육도 전쟁의 상흔이 깔린 음식이라는 것이다.
아편전쟁이 끝난 직후인 1842년 청나라와 영국은 강화조약을 맺는다. 홍콩이 150여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은 것도 이 조약 때문이다. 그 무렵 홍콩과 광저우 등지에 많은 영국인이 이주한다. 그러나 이들은 물설고 낯선 곳에서 음식 고생까지 하게 되고, 급기야 중국 측에 항의하기에 이른다. 이에 중국 측에서 육식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의 입맛에 맞고 포크로 찍어 먹거나 서투른 젓가락질로도 잘 집어먹을 수 있는 요리를 개발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탕수육이라는 것이다.
재미 삼아 떠도는 이야기지만 중국의 굴욕을 강조하고 음식까지도 승자의 입맛에 맞춰야 했던 근대 중국의 비굴을 조롱하는 뉘앙스가 없지 않다.
탕수육은 19세기 말 인천이 개항된 이후 중국 산둥성 출신 화교들이 인천에 차이나타운을 형성하면서 한국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오늘날과 같은 탕수육의 형태는 1990년대 이후 자리잡게 됐다. 본래 탕수육은 녹말로 반죽한 고기를 튀긴 후 소스를 부어서 바삭하면서도 푹신한 식감을 유지하는 요리였다.
그러나 배달 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저가로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중국 식당들이 생겨난 게 컸다. 중국 식당들은 조리 시간과 원가 절감을 위해 미리 튀겨놓았다가 다시 튀겨내는 탕수육을 만들었다. 그리고 떨어진 튀김 맛을 감추기 위해 케첩과 설탕, 통조림 과일 등을 많이 넣어 소스를 더욱 자극적인 맛으로 바꿨다.
이 때문에 기존에는 소스를 부어도 바삭했던 탕수육은 배달하는 동안 눅눅해지지 않기 위해 탕수육과 소스가 따로 나오는 형태가 됐다.

'부먹'과 '찍먹', 탕수육을 먹을 때 빠지지 않는 논쟁이 따른다. 탕수육과 소스의 조화로운 앙상블을 위해 소스를 부어 먹어야 한다는 의견과, 튀김을 바삭함을 즐기기 위해 소스를 찍어 먹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연복 셰프는 "튀김 상태에 따라 다르다"면서 "튀김옷이 두껍고 딱딱한 탕수육의 경우 부먹이 좋다. 소스를 미리 부어놓으면 튀김옷에 소스가 스며들어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튀김옷이 얇고 부드러우면 찍어 먹는게 훨씬 바삭하고 맛있다"고 판정했다. 결론은 탕수육 튀김 상태를 봐가며 융통성 있게 결정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탕수육의 원형은 중국의 탕추러우에서 찾을 수 있지만,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해온 탕수육은 이제 한국 음식 반열에 올려도 되지 않을까 싶다.
한편 온라인상에서 10월 26일은 탕수육을 먹어야 하는 '탕탕절'로 통한다. 한국 역사에서 유독 이날 총·대포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이 많았던 탓이다.
1597년 10월 26일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이, 1909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1929년 10월 26일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이, 1979년 10월 26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저격당한 날이다.
다만 이런 날짜는 의미 부여를 위해 끼워 맞췄다는 지적도 있다. 명량대첩은 1597년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일어났으며, 청산리 대첩도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이뤄진 5일간의 전투로, 10월 26일에 의미 부여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무리가 아니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