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압도적으로 시장점유율 1위... 거대한 나라의 국민라면 된 한국 라면
2025-02-22 15:51
add remove print link
이례적으로 저명상표 등록... 반영구적으로 상표 보호

러시아의 추운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지르는 열차 안. 따뜻한 국물 한 모금으로 하루를 버티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손에 들린 건 다름 아닌 팔도 도시락 라면. 이 작은 사각 용기면은 어느새 러시아 전역을 사로잡으며 ‘국민 라면’이 됐다. 현지에서 ‘다쉬락’으로 불리는 이 라면은 단순한 식품을 넘어 러시아 사람들의 일상에 깊이 뿌리내린 상징이 됐다. 러시아 라면 시장에서 팔도 도시락이 점유율 1위를 차지한 그 비결과 여정을 풀어본다.

팔도 도시락은 러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 시장조사기관 프라다지(Prodazi)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5월 기준 팔도 도시락은 러시아 라면 시장 점유율 33.9%를 기록하며 1위에 기록했다. 2위인 롤튼(22.1%)과 3위 빅본(11.2%)을 큰 격차로 따돌린 수치다.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비러시아 기업은 팔도와 6위 삼양식품(0.7%)뿐이다. 이 숫자는 팔도 도시락이 단순히 외국 브랜드로 머물지 않고 러시아 시장을 장악한 증거다. 현지 언론에서도 “도시락은 러시아인의 입맛과 생활에 완벽히 녹아든 K푸드의 대표주자”라는 평가가 나온다.
도시락의 성공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도시락의 성공 이야기는 1990년대 초 부산항에서 시작된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던 러시아 선원과 보따리 상인들이 사각형 도시락 라면을 손에 들고 배에 올랐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안정적으로 먹을 수 있는 각진 모양과 칼칼한 국물 맛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러시아 전통 수프인 보르시와 비슷한 느낌이 현지인들에게 친숙함을 줬다. 끓여 먹는 라면이라는 생소한 개념이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했다. 팔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97년 현지 사무소를 열었다. 시작부터 대박이엇다. 첫해 판매량이 무려 7배나 뛰었다. 시작하자마자 뿌리를 내린 셈이다.
1998년 러시아가 재정난으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했을 때 위기가 찾아왔다.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고 외국 기업들이 줄줄이 철수했지만 팔도는 남는 길을 택했다. 투자 초기라 매몰 비용이 적었다. 또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거대 시장을 포기하기엔 아까웠다. 이 선택은 신의 한 수였다. 1999년 경제가 회복되자 팔도는 블라디보스톡을 넘어 시베리아와 우랄까지 판매망을 넓혔다. 2000년대 들어 연간 판매량은 2억 개에 육박했고, 2002년과 2008년에는 각각 라멘스코예와 리잔에 현지 공장을 세웠다. 현지 생산은 가격 경쟁력을 높였고, 도시락은 약 8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러시아인들의 식탁에 올랐다.
숫자만 봐도 성장세는 명확하다. 2005년 러시아 매출 7000만 달러를 시작으로 2010년 이후 매년 10% 이상씩 늘었다. 2016년에는 2억 달러를 돌파하며 러시아인 1명당 연간 2개씩 먹는 수준에 이르렸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 평균 성장률은 15%에 달했다. 2023년 팔도 러시아 법인의 매출은 4915억 원을 찍었다. 전년과 견줘 65%나 오른 수치다. 전체 매출의 90% 이상을 라면이 책임졌단 점을 고려하면 도시락의 위엄을 실감할 수 있다. 도시락은 러시아 용기면 시장에서 점유율 60%를 꾸준히 유지하며 경쟁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현지화 전략이 성공의 핵심이다. 팔도는 러시아인의 입맛에 맞춰 매운맛을 줄이고 닭고기, 버섯, 새우 등 10여 가지 맛을 선보였다. 특히 마요네즈를 사랑하는 러시아 식문화를 반영해 2012년 도시락 플러스를 내놨다. 뜨거운 국물에 녹아드는 마요네즈의 고소함이 현지인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모든 제품에 포크를 넣어 편리함을 더한 점도 주효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도시락을 먹는 장면은 러시아 여행의 흔한 풍경이 됐다. 현지 언론은 “도시락은 단순한 라면이 아니라 러시아인의 일상에 녹아든 문화”라며 찬사를 보냈다.
러시아에서의 위상은 공식 인정으로도 이어졌다. 2014년 러시아 국가 상업협회가 주관하는 ‘올해의 제품상’을 라면 업계 최초로 받았다. 도시락은 이후 총 다섯 번이나 상을 받으며 인기를 입증했다.
2021년 4월에는 러시아 특허청이 도시락을 225번째 저명상표로 등록했다. 아디다스, 샤넬 같은 글로벌 브랜드만 인정받는 이 상표권은 한국 기업 최초로 부여된 쾌거였다. 러시아 특허청은 “도시락은 러시아에서 라면 자체를 뜻하는 말로 통한다”며 저명성을 공식화했다. 이로써 도시락은 별도 갱신 없이 반영구적으로 상표 보호를 받게 됐다.
팔도 도시락의 성공은 러시아 현지에서도 화제를 모은다. 현지 언론은 “팔도는 위기 속에서도 러시아를 떠나지 않은 의리 브랜드”라며 1998년 잔류 결정을 높이 산다. 또 “끊임없는 맛 조정과 품질 향상으로 국민 라면이 됐다”고 보도한다. 전쟁 등 불안정한 환경에서도 점유율은 흔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