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이경희 '색의 잔상(殘像)'... 수필과 비평 작품상
2025-01-14 12:44
add remove print link
이경희 수필가, 2023년 2월 수필과 비평 신인상, 2022년 제49회 신라문화제 전국 향가 시낭송대회 대상 수상 등
수필가 이경희의 작품 '색의 잔상(殘像)'이 수필과비평 '2024 올해의 작품상12'를 수상했다.
부산광역시 출신으로 현재 경북 포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경희 수필가는 2023년 2월 수필과 비평 신인상, 2022년 제49회 신라문화제 전국 향가 시낭송대회 대상 등을 수상했다.
'색의 잔상(殘像)'/이경희
가을의 마지막 절기인 상강霜降도 지났다.
어디를 가도 가을의 정취가 가득하다.
해 질 녘, 현란한 단풍 숲속을 거닐다 노을 품은 한 무리 댑싸리 군락지 앞에 걸음을 멈춘다.
붉은색만이 아닌 인공적 물감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파스텔톤의 어우러짐에 감탄한다.
생을 다해 말라 있는 황톳빛 댑싸리조차 석양에 아름답다.
형형색색의 빛깔 하나하나가 자기만의 색을 추구하며 견뎌낸 삶의 색들이 고귀하다.
문득 한 생을 품었던 시간의 에너지가 남긴 저 색들의 잔상이 인간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세상은 다양한 색의 결집체이다. 나도 그 속 하나의 색일 것이다. 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탈색되거나, 변치 않거나 때로는 아쉽게도 본연의 색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이도 저도 아닌 희멀건 경계의 색으로 남기도 한다.
나는 푸른 싱그러움으로 눈과 마음을 채우는 초록색을 무척 좋아한다. 여름날 빛났던 내 청춘의 색이기도 하지만 편안함과 안온함을 동시에 느껴서다. 시원하지만 따뜻함이 없는 양면성의 파랑은 조심스럽다. 따뜻함을 한껏 뿜어내는 노랑이 주는 느낌은 포스근 하지만 설렘이 없다.
인생의 황금기인 중년의 정열적인 빨강은 왠지 망설여지면서도 다가 가보고 싶은 색이다. 그리고 점차 황혼을 향해가는 듯한 저 황톳빛도 나태한 내 눈과 무딘 감성에 노릇한 온기로 점점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초록 물결로 출렁이며 나의 오감을 자극하던 이십 대엔 모든 것이 그저 감사로 충만했고, 뭔지도 모를 무언가를 꼭 해야만 할 것도 같았지만 그조차도 행복이었다. 때론 연두에 설레고 초록에 한껏 부푼 내 마음을 더 높이 띄워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사회인으로 홀로 서면서 제각각의 개성으로 색을 무장하고 다가오는 인연들이 내 존재 가치를 깡그리 앗아가기도, 나의 마음을 휘저어 놓기도 했다.
어설프기만 했던 나는 누군가의 언행이나 겉모습만으로 그만의 색을 가려 내기란 쉽지 않았다. 누군가 초록의 모습으로 왔다면 다가오는 이들은 모두가 초록일 거라는 단순세포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때론 삶이란 변화무쌍하여 미묘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분명 초록이었는데 어느새 청록이 되고, 노랑이 되고, 빨강이 되어 낯설게 나타날 때는 적잖이 겁도 나면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상대가 본연의 색을 잃었다고 실감할 때는 이미 늦어 내 상처는 곪고 있었다.
어느 날, 분홍빛으로 응원하며 내게 손뼉을 쳐 주던 이들이 상황이 달라졌다고 돌아서면서 시퍼렇게 날 세운 침묵을 견뎌 낸 적이 있다.
오롯이 짐 진 삶으로 살면서 비참함에 밤잠 설쳤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울컥했다.
응어리를 뱉어내지도 못한 채 무언의 눈길로 애애히 견딜 때, 차라리 사장(死藏)된다는 말보다 버려진다는 느낌이 더 들었다.
그들이 보여준 본연의 색이 퇴색되면서 이면의 잔상으로 고스란히 남아 분노하고 자괴감으로 힘들었다.
배신이란 글자를 누구도 좋아할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는 않지만 실행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나 보다.
또한 세상엔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존재한다고 믿어왔던 나였다. 그런데 그 믿음이 종종 어긋날 때가 있었다.
누구보다 서로 마음을 나누고 신뢰하며 돈독한 믿음을 나누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가까운 이가 말없이 떠나 버릴 때는 영문도 모른 채 야속해하며 원망도 했다. 말 한마디라도 남길 수 있는 사이라 여겼었는데 고작 그 정도의 관계였다는 생각에 슬퍼했던 기억도 있다.
처음 본연의 색을 숨기고 다가와 희미한 무채색의 흔적을 남기고 떠난 이는 알까. 자신의 기준에서 심지어 곱지 않은 생각으로 상대를 판단해 버리는 오류로 상대방이 받을 상처를.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색의 사람들을 만나 스며들기도 하고 푹 빠지기도 하며 그 잔상들을 보았다. 황홀한 색상으로 달곰하게 다가왔다 쌉싸름한 맛과 경계를 잃은 무채색의 잔상으로 사라지는 이도 보았고, 강물이 바닷물에 스미듯 다가와 신비한 색의 잔상으로 남는 이도 있었다.
주위에는 화끈한 데 쫄깃한 맛처럼 특별하거나, 달싹하면서도 쌉싸름하니 그저 그런 편안한 느낌의 색으로 존재하는 이들이 더 많다는 걸 느끼는 요즈음이다. 그래서 세상은 아직 바라볼 만하다. 패륜과 흉악한 범죄가 범람하지만, 그래도 아직 세상은 곱고 따뜻한 색을 지닌 이들이 더 많아 살만하다.
훗날 내 색의 잔상은 어떤 색으로 비칠까. 한때는 세상이 온통 내가 좋아하는 초록 물결로만 출렁거렸으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삶의 빛깔들이 다양함을 추구하며 견디는 삶이 고귀하다고 생각이 든 것은 마흔이 넘어서였다. 이제는 치이고, 부딪혀 긁히면서 생긴 상처도 고운 빛으로 아물 때 더 의미있음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너무 강렬한 색으로 경계의 대상이 되지도 말고, 너무 어둡고 불투명해 가까이 오기 두려워지는 색이 아닌 댑싸리의 저 파스델톤의 어우러짐만이 있는 아름다운 세상의 일원으로 살고 싶다.
세상은 각양각색(各樣各色)의 색이 있어 아름답고 희망이 있듯, 나 또한 그 색들에 기꺼이 섞여 어우러지리라. 그렇다고 그들의 색을 내 방식대로 채색하지도 않을 것이며, 눈에 거슬리게 불거지는 색으로 다가가지도 말 것이며, 내가 누구에게 길들기를 거부하듯 누구를 길들이려 채색하는 수고 또한 않을 것이다.
따사롭던 햇살이 차가운 공기에 그 세력을 내주고 사라지듯, 어떻게 살아야 하나의 불안감과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읊조림 사이에서 나만의 색으로 흘러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