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한국영화 키워드, '리메이크 열풍'…“익숙한 감성으로 위안 얻다”
2025-01-0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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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세상을 담아야 하는데 그런 영화가 없어서 아쉬웠다”
지난해 국내 영화 시장은 전반적인 침체 속에서도 리메이크 작품과 재개봉 영화가 큰 주목을 받으며 극장가의 새로운 트렌드를 형성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의 활기를 회복하지 못한 가운데, 관객들은 검증된 콘텐츠에 대한 선호를 보이며 외화를 리메이크하거나 과거 흥행작을 재개봉하는 작품들이 연이어 성공을 거뒀다. 이에 영화계는 새로운 흥행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해 리메이크 작품 중 가장 성공한 영화는 '파일럿'이다. 이 영화는 스웨덴 영화 '콕핏'을 원작으로 한 코미디 영화로, 젠더 문제를 유머로 풀어내며 관객들에게 호평받았다. 조정석의 여장 남자 연기는 독보적이었으며, 그는 이 작품으로 '제11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제작비 98억 원으로 손익분기점 220만 명을 훌쩍 넘겨 47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중예산 영화 '핸섬가이즈'도 주목받았다. 미국 영화 '터커 & 데일 Vs 이블'을 원작으로 한 이 코미디 영화는 제작비 46억 원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중박 흥행에 성공했다. 또, 대만 영화 '청설'을 리메이크한 작품도 평단의 지지를 받았다. 청각장애를 소재로 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청설'은 배우 홍경의 수어 연기와 감정 표현으로 관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 작품은 한국 영화로는 2024년 11월 흥행 1위를 기록하며 매출액 71억 원을 기록했다.
콜롬비아 영화 '히든페이스'를 원작으로 한 동명 영화는 독특한 가옥 구조를 활용해 인간의 욕망을 다채롭게 표현하며 흥미를 끌었다. 김대우 감독이 연출하고 송승헌, 조여정이 출연한 이 작품은 매출액 61억 원을 기록하며 흥행 상위권에 올랐다. 허진호 감독의 '보통의 가족'은 소설 '더 디너'를 한국 정서에 맞게 풀어내며 제48회 토론토 국제 영화제에 초청되는 성과를 거뒀다. 비록 흥행에서는 다소 아쉬운 성적을 냈지만, 영화적 완성도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같은 리메이크 열풍은 올해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2007년에 개봉한 대만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리메이크한 작품이 이번 달 개봉한다. 배우 도경수가 출연해 더욱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영화는 지난해 6월 일본에서 먼저 리메이크되어 개봉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노스텔지어 현상으로 보기도 했다. 예전에 유행했던 영화를 그대로 재개봉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 흐름에 맞게 탈바꿈해 '안전한 새로움'을 찾는다는 것이다.
리메이크 열풍은 과거 검증된 흥행작들을 재개봉하는 흐름으로도 이어졌다. 2004년작 '노트북'과 2014년작 '비긴 어게인'은 각각 19만 명과 23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신작을 능가하는 인기를 보여줬다. 일본 로맨스 영화 '남은 인생 10년'은 첫 개봉 당시보다 3배 많은 관객을 재개봉에서 동원해 화제가 됐다. 이처럼 재개봉 영화는 이미 흥행성과 작품성을 검증받았다는 점에서 관객들에게 신뢰를 주며 극장과 배급사 모두에게 경제적 이점을 제공하고 있다.
속편 영화의 강세도 눈에 띈다. '범죄도시4', '베테랑2', '듄 2'를 비롯한 속편들은 전편의 흥행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관객들의 선택을 받았다. 이와 함께 입소문과 SNS에서의 화제성이 관람 패턴에 큰 영향을 미치며, 관객들이 검증된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화됐다. CJ엔터테인먼트의 자료에 따르면 관객들의 평균 관람 시점이 개봉 후 15.5일로 과거보다 5일가량 늦어졌다.
이를 두고 이은희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명예교수는 위키트리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인터넷과 같은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의 삶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지만 이러한 변화를 적절히 담아낸 영화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과거의 감성을 추구하는 것이 단순히 복고적인 감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전처럼 핵심적인 관계와 감정을 탐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라며 "인터넷과 복잡한 사회 구조로 인해 심화된 피로감을 느끼는 현대인들이 과거의 단순한 감성에서 위안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현재 영화계가 너무 안전하게 가고 있다. 영화도 예술이기에 새로운 도전이 자꾸 있어야 하고, 변화된 세상을 담아야 하는데 그런 영화가 없어서 아쉬웠다"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해 1월부터 12월까지 2024년 영화 누적 관객 수는 1억 2312만 5468명(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으로 2023년 총 관객 수는 1억 2513만 6265명보다 약 200만 명 정도 차이가 나는 상황이다. 이는 코로나 19 이전 2019년 2억 2667만 8228명으로 가장 많은 관객수를 기록한 것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13년부터 시작된 연 관객 2억 명 시장이 코로나로 무너진 뒤 고착되는 양상이다. 특히 대작 영화의 제작이 감소하며, 순제작비 100억 원 이하의 중급 영화들이 흥행을 주도하고 있다. '파일럿', '탈주', '핸섬가이즈' '그녀가 죽었다' 등이 이를 대표하는 사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영화 산업의 위기 극복을 위해 다양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7월 출범한 '영화산업 위기극복 영화인연대'는 홀드백 문제와 스크린 독과점, 관람료 현실화 등에 대해 논의하며 산업의 구조적 문제 해결을 모색하고 있다. 또, 영화관 입장권 부과금 폐지가 국회를 통과하며 영화발전기금의 재원 확보 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떠오른 상황이다.
특히 관람료를 두고 배우 최민식은 지난해 8월 MBC 손석희의 질문들에서 영화 티켓 가격 인하를 주장했다. 그는 "지금 극장 값이 너무 올랐다. 좀 내려라. 갑자기 그렇게 올리시면 나라도 안 간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학과 교수는 "영화관 사업은 민간 기업으로, 권력 집단도 아닌데 가격 인하하라는 이야기가 무슨 소신 발언인가"라며 "시장 가격을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면, 세상에 사업은 없고 경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팬데믹 중에 영화관들은 부도 위기에 직면했었는데 최민식 배우는 출연료를 자신들의 영화를 상영해 주는 극장을 위해 기부라도 했었나"라고 목소리를 냈다.
여기에 대해 이은희 교수는 "최근 영화 관람 후 감상에 대한 토론이 온라인에서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톱스타 배우만으로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영향력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라며 "영화 산업에는 스타 배우 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참여하며, 이들은 영화 흥행 여부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 만큼 톱스타의 높은 개런티가 과도하게 부각되는 언론 보도는 적절치 않다"고 촌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