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1곳에서만 100만명 이상 관람... ‘터미네이터 2’보다 흥행한 한국영화
2024-11-25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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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단성사에서만 100만명 넘게 본 영화의 정체
서울 기준 관객 숫자 100만 단위를 한국 최초로 넘긴 영화는 어떤 작품일까.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다. 1993년 개봉한 영화 ‘서편제’는 한국 영화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와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제작한 영화는 한국의 전통 예술인 판소리를 중심으로 인간의 슬픔, 고난, 예술적 열정이 교차하는 이야기를 담으며 한국적 정서를 아름답게 표현했다. ‘서편제’는 단순한 상업 영화의 틀을 넘어선 문화적, 예술적 성과로 평가받으며 한국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대표작으로 꼽힌다.
‘서편제’는 일제강점기의 혼란 속에서 방랑하며 살아가는 유봉(김명곤)과 그의 딸 송화(오정해), 그리고 의붓아들 동호(김규철)의 이야기를 그린다. 유봉은 판소리 명창으로,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완성하기 위해 딸 송화를 엄격하게 훈련시킨다. 그러나 그는 예술적 성취를 위해 딸의 시력을 희생시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 선택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비극적 정서를 만들어낸다. 한편 동호는 유봉의 강압적 방식과 예술에 대한 집착을 견디지 못하고 가족을 떠나게 된다.
영화는 어른이 된 동호가 송화를 찾아 나서면서 진행된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서사는 가족의 복잡한 관계와 상처를 되돌아보게 한다. 송화는 유봉의 가르침 아래 최고의 예술적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녀의 삶은 희생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반면 동호는 예술보다 자유를 선택했으나, 송화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영화의 결말에서 동호는 송화와 재회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그들이 함께 부르는 판소리는 과거의 상처와 화해를 상징하며 영화의 정점에 이른다.
‘서편제’의 핵심은 단연 판소리다. 영화는 판소리를 단순히 전통 음악으로 묘사하는 것을 넘어, 등장인물의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활용한다. 특히 송화가 부르는 소리는 그녀의 슬픔과 고난, 그리고 예술에 대한 헌신을 집약적으로 표현한다. 영화의 배경음악과 판소리 장면은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이는 음악과 영상의 조화로 한국적 정서를 극대화한 사례로 손꼽힌다.
오정해는 실제로도 판소리 명창으로서 영화의 음악적 완성도를 높였다. 그녀의 연기는 판소리를 단순히 부르는 것을 넘어 영화의 서사에 생명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특히 송화가 아버지 유봉과 함께 부르는 ‘진도아리랑’ 장면은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하며 영화의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전달한다.
‘서편제’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잡으며 흥행 면에서도 기록적인 성공을 거뒀다. 서울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 최초로 서울 단일 지역에서 100만 관객을 달성한 작품이 됐다.
당시 상영관 수가 제한적이었던 상황을 고려할 때 더욱 놀라운 성과로 평가된다. 당시엔 지금처럼 멀티플렉스가 없었다. 단관 개봉 시절이기 때문이다. 단성사는 서울에서 196일간 ‘서편제’를 상영했는데, 거의 매회 매진에 가까운 흥행을 기록했다.
1990년대 초반 한국 영화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밀려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서편제’는 이 흐름을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제로 당시 해외 영화 대작인 ‘늑대와 춤을’(1990)과 ‘터미네이터 2’(1991)조차도 각각 서울에서 98만 명, 92만을 기록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의 전체 점유율이 10~20%대에 머물랐다는 점을 고려하면 ‘서편제’의 흥행이 얼마나 놀라운 성과인지 알 수 있다.
흥행의 성공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영화는 개봉 초반부터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으며, 관객들은 판소리와 한국적인 영상미에 매료됐다. 당시 영화계에서는 흥행이 빨리 식는 ‘단기 흥행’이 일반적이었지만, ‘서편제’는 긴 시간 동안 관객들의 사랑을 받으며 롱런했다. 특히 일부 관객은 영화를 보고 난 뒤 실제 판소리 공연이나 영화 OST를 찾아 나서며 전통예술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영화의 흥행에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다. 당시 전국적으로 영화 상영이 이뤄진 가운데, 몇몇 지역에서는 영화관이 초만원을 이루어 관객들이 계단이나 바닥에 앉아 영화를 관람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OST가 비공식적으로 유통되면서 음악 역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으며, 이후 한국 영화의 흥행 전략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임권택 감독은 ‘서편제’를 통해 한국 전통 예술과 영화의 융합을 실험했다. 그는 정성일 영화평론가와의 대담에서 “우리의 정서와 예술을 세계에 알리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언급하며, 영화가 단순한 상업적 성공을 넘어 문화적 가치를 전달하길 바랐다. 이러한 노력은 ‘서편제’를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으로 만들었다.
임권택 감독은 영화 촬영에서도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자연광을 활용한 촬영 기법과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은 영화의 비주얼적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전남 곡성군의 자연경관은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됐으며, 이후 ‘서편제’ 촬영지는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서편제’는 단순히 영화로서의 성공에 그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전통 예술인 판소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으며, 이후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영화와 공연 예술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개봉 이후 ‘서편제’는 전 세계 영화제에서도 주목받았다. 특히 1993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초청돼 한국 영화의 위상을 높였으며, 이후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았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서편제’는 한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회자된다. 이 영화는 예술과 삶의 관계를 깊이 있게 탐구하며, 전통과 현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서편제’를 통해 우리는 한국적인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세계적으로도 통할 수 있는지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